[시대만필] 고전(古典)은 고전(古傳)일 뿐이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가장 감명받은 책은 ‘논어(論語)’이며 자신을 만든 것도 ‘논어’라고 말했다. 초일류 기업을 만든 분의 좋아했던 책이 ‘논어’라는 게 의아했다.

대부호였던 록펠러나 카네기 자서전도 아니고 경영서도 아닌 왜 ‘논어’일까? ‘논어’가 사람을 다루고 인재를 발굴하고 일을 잘할 수 있게 해주어서인가? ‘논어’를 전혀 읽지 않은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이 대그룹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앞을 내다본 그의 능력과 시운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다. ‘논어’는 부차적 요건이다.

동서양 고전의 역할과 효용은 어디까지일까? 고전은 세상 모든 이치가 담겨있고 읽기만 하면 인간관계의 달인이 될 수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전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산물이다. 고전은 오랫동안 살아남고 존중받아 온 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현실에 꼭 부합하지는 않는다.

고전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김일성 전집이나 모택동 어록은 북한과 중국에서는 필수 고전이지만 대한민국과 대만에서는 헛소리일 뿐이다.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우리에겐 위서(僞書)이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일본인에겐 관심도 없는 역사책이다. 논어나 사기(史記)가 아무리 고전이라 한들 그것은 춘추시대와 한나라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성우월주의, 전제적 군주제, 그리고 인권이나 법치는 아예 없는 시대적 한계를 가지니 지금 사람들이 볼 때는 황당할 따름이다. 인간은 수천 년 전이나 똑같다고 주장한들 안쓰럽기만 하다. 영원한 초월적 감동이나 교훈을 기대하는 사람은 빨리 그 헛된 꿈에서 빠져나오는 게 낫다. 고전(古典)은 오래 전해 내려오는 고전(古傳)일 뿐이다.

고전(古典)은 읽혀야 고전(古典)이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이란 누구나 칭찬하나 읽지는 않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고전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나 보다. 50년 전 소설가 최인호는 ‘청년문화 선언’에서 ‘고전이 무너져 간다고 불평하지 말고, 대중의 감각이 세련되어 가고 있음을 주목하라’고 지적했다. 이런 것이 통찰력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고전을 강변하는 사람은 관련 교수와 출판인, 고전을 번역하는 사람들, 그 고전을 토대로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플라톤의 ‘국가’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술술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시 읽게 되더라도 어려우면 안 읽으면 그만이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면 던져버리면 된다.

지금은 우리 곁에 안 계신 이어령 선생을 뵌 적이 있다. 20년 전쯤 일인가 보다. 만나면 늘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선생님, 단테의 신곡 읽었을 때 이해가 되던가요?" "나도 어렵긴 마찬가지야. 스트레스 받지 말고 다른 쉬운 걸 읽어요. 정 읽고 싶으면 신곡 관련 해설서를 먼저 읽어요."

당대의 석학인 이어령 선생도 어려운 게 고전이다. 그런 신곡을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단테 소나타 연주하려고 외우다시피 읽었다고 한다. 천재는 따로 있나 보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 말씀대로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는 것이 고전이다. 그런 고전을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됐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고전은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딱하기만 하다.

차라리 ‘고전의 이 부분은 지금 별 의미도 없고, 저 부분은 이렇게 변용해 써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나마 고전을 살리는 길이다. 고전을 읽지 않는 최대의 이유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자의 책임이 아니라 책을 쓴 사람과 번역한 사람 탓이다. 고전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할 필요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당대 현역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는 수명이 10년이라고 단언했다. 소위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도 수명이 짧아졌다. 하루키는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책보다도 재밌는 게 많은데 굳이 책을 읽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전을 강요하는 이들도 이제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화석이 돼버린 고전에 대해 끊임없는 회의의 눈초리를 보내고 이 시대에 필요한 고전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세련되게 전달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인재 전 파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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