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윤] ‘금테안경’ 최동원의 커브를 찾아서

故최동원 전 한화 퓨처스 감독은 생전에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1984년 한국시리즈와 같은 상황이 다시 있어도, “다시 그렇게 던질 것 같다”라고 밝힐 정도로 책임감이 강했다. (사진=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 스틸컷)

“잘 친 겁니다. 별 것 없어요. 잘 쳤어요.”

불세출의 대투수 故최동원 전 한화 퓨처스 감독(이하 호칭 생략)의 현역 시절이라고 하면 아마 홀로 4승(5차례 등판)을 올린 1984년 한국시리즈나 선동열 감독과의 15이닝 무승부를 떠올릴 것이다. ‘머니피치’ 역시 그 시리즈나 15이닝 무승부 경기에 관한 기억이 강렬하다. 하지만 ‘머니피치’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경기는 다른 게임이다.

1984년 9월 20일, 부산 구덕구장에서 롯데와 OB(현 두산)와의 경기가 열렸다. 경기 전까지 롯데는 27승 1무 19패로 후기리그 1위였고, OB는 25승 1무 21패로 2위를 달리고 있었다. 롯데와 OB의 승차는 2경기. 이 경기 후 남은 경기는 각각 2경기씩이라서, 롯데가 이기면 후기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중요한 맞대결이었다.

1-1로 팽팽하게 맞선 4회 초, 롯데는 에이스 최동원을 마운드에 올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최동원은 전날 해태전에서도 4회 마운드에 올라 삼진 7개를 솎아내며 3피안타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구원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날은 롯데 벤치의 기대와는 경기가 다르게 전개됐다. 최동원은 박종훈에게 솔로 홈런을 맞은 것. 몸 쪽 높은 곳으로 꽉 찬 빠른 공을 박종훈이 잘 받아친 것이다. 4회 말 롯데는 김용희의 적시 3루타로 2-2 동점을 만들었다.

최동원은 5회와 6회를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구덕구장을 가득 메운 홈팬의 열기는 더더욱 뜨거워졌다. 그리고 운명의 7회 초. 선두 타자 박종훈이 타석에 들어섰다. 롯데 팬들은 기세가 오른 최동원이 앞선 타석의 설욕을 할 것으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종훈은 또다시 몸 쪽 높은 곳으로 꽉 찬 빠른 공을 받아쳤고, 타구는 외야 펜스 너머로 날아갔다.

박종훈의 연타석 홈런에 힘입어 OB는 롯데에 3-2로 승리를 거뒀다. 최동원은 삼진 8개를 뺏어내며 역투를 펼쳤지만, 박종훈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줘 끝내 고개를 떨궜다. 이날, 롯데가 승리했다면 자력으로 후기리그를 우승하며 삼성전에서 나온 ‘져주기 경기’도 없었을 것이다. KBO리그 역사도 꽤 달라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박종훈 전 한화 단장은 그날을 되돌아보며 “빠른 공이 같은 곳에 들어왔다”라고 밝힌다. ‘머니피치’는 이것에 대해 최동원 전 퓨처스 감독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답변은, 모두에서 쓴 것처럼 박 전 단장이 잘 쳤다고 되뇌었다.

1984년 최동원은 27승과 함께 당시로는 한 시즌 최다인 223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이해, 롯데가 치른 100경기 중에서 51경기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거둔 성적이었다. (사진=머니피치)

투수가 같은 타자를 상대로 얻어맞은 곳에 또 던진다는 것. 결과만 보면 투수의 무신경함이나 오만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곳에 또 던진다는 것은 무신경함도 오만도 아니다. 투수든 야수든 프로야구 선수, 더 나아가서는 스포츠 선수가 그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머니피치’가 만난 이들은 ‘자신감’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신감, 즉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야구 선수는 항상 불안 속에서 플레이하고 살아간다. 투수는 내 공이 얻어맞으면 어떻게 하지, 타자는 안타나 홈런을 때려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 수비수 역시 실책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다. 이 불안이 경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기가 끝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할 때도 불안은 계속된다. 대부분 선수는 그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연습에 매진하며 철저히 준비한다. 그래도 불안은 남아 있다. 조금 더 준비를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충분히, 혹은 제대로 준비했음에도.

결국, 그 불안을 이겨내는 근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에 있다. 투수든 타자든 야수든 스스로를 믿고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긴박한 승부처에서 실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내 공에 믿음이 있으면 타자와의 승부를 피하지 않는다. 물론, 한두 차례 전략적으로 변칙적 승부를 할 수는 있어도, 믿음은 실천에서 나오므로 공격적인 투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최동원의 연세대 시절, 감독이었던 故이재환 전 일구회 회장은 “선수에게 불안, 혹은 긴장은 일상의 일부이며 숙명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천하의 대투수인 (최)동원이도 긴장했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을 뿐. 긴장과 불안하지 않는 선수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긴장과 불안에 잡아먹히는 선수가 있거니와 그걸 이겨내는 선수가 있다. 이게 일류와 이류 선수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동원이를 비롯해 이름 높은 선수는 다들 나르시시스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내가 최고라는 강한 자기애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즉, 최동원 역시 한국야구계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대투수가 된 데는 내 공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공을 누구도 칠 수 없다. 안타나 홈런을 맞은 것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런 자부심이 홈런을 맞은 곳에 똑같은 공을 또 던질 수 있었다.

똑같은 곳에 또 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제구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최동원이라고 하면 금테안경과 강속구의 이미지가 강해, 제구력과 변화구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곧잘 잊곤 한다. 그는 1981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을 맺으며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뻔했다. 그때 토론토의 스카우팅 리포트에 따르면, 빠른 공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더 높이 산 것은 제구와 변화구 구사 능력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최동원을 상대 팀으로 만난 김광수 일구회 회장 역시 토론토 평가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최)동원이랑 같은 팀이면 상대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로 공이 좋았다(웃음). 속구도 빨랐지만 제구가 엄청났다. 제구라고 해서 단순히 스트라이크를 많이 던진 게 아니다. 자기가 던지고 싶은 곳에 정확하게 던진 줄 알았다. 게다가 커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만화책 속에서나 나오는 마구 같았다.”

‘머니피치’는 안병환 전 LA 다저스 스카우트와 한문연 전 NC 배터리 코치를 만나 최동원의 마구와 같은 커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병환 전 스카우트는 경남중학교 시절 최동원과 배터리를 이뤘고, 이후로도 친교를 이어가 최동원의 성장 과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다. 한문연 전 코치는 대학 시절 국가대표를 비롯해 롯데에서 거의 최동원의 전담 포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랜 시간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다.


안병환 전 스카우트는 “대개 공이 빠른 투수의 속구를 칠 때는 속으로 ‘하나, 둘, 셋’하고 쳤는데, 동원이 공은 ‘하나, 둘’하고 휘둘러도 칠까 말까 했을 정도로 남달랐다”라고 밝힌다. (사진=이영미 기자 제공)

안병환 전 스카우트는 최동원이 대투수가 된 데는 “좋은 연습 환경”을 우선 손꼽았다. “(최)동원이 집에 가서 가장 놀란 게 집 마당에 투구 연습장이 있었어요. 철망이 설치되어 있고, 타깃에는 공이 맞고 이리저리 튀어나오면 안 되니까 탁 떨어지게끔 비닐 포대로 만들어 놨더라고요. 그리고 빗물이 빠지는 플라스틱 배수관이 있잖아요. 그걸 반으로 쪼개서 포수 쪽에서 던진 공을 굴리면 동원이 쪽으로 또르르 굴러가서 옆에 모이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연습하지만 집에서도 혼자도 둘이서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어 마음껏 연습한 게 컸다고 생각해요.”

이 연습 환경을 만든 이는 최동원의 아버지 故최윤식 씨다. 최윤식 씨는 야구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국외 야구 서적이나 비디오 등을 보며 야구 지식을 쌓아, 야구인 못지않게 야구에 해박했다. 한 원로 야구인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 당시 지도자 수준은 지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특히, 유소년 시절에는 크게 가르쳐주는 것도 드물었다. 단순히 매일 같이 뛰고 공을 던지고 치고 받는 게 반복된 일상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게 큰 장점이 됐다. 선진야구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실제로 외국어 선생이 감독을 한 사례도 있었다.”

안병환 전 스카우트는 최윤식 씨의 독특한 연습법을 소개해줬다. “동원이 제구가 정말 좋았거든요. 딱 미트를 대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들어왔어요. 하루는 아버님이 저한테 바깥쪽으로 앉아라고 하더라고요. 인사이드나 아웃사이드도 아닌 바깥쪽으로. 그것도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서 한가운데에 앉으라고 했어요. 즉, 바깥쪽으로 옮기되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나가지 말고 바깥쪽 한복판에 앉으라는 거죠.”

“그러면서 커브를 던지게 했어요. 커브가 오른손 타자 몸 쪽에서 크게 휘어져 떨어졌으니까, 어차피 타자는 몸쪽 커브로 인식하겠죠. 또 앉을 때도 타깃을 크게 형성해주라고 했어요. 그게 제구를 향상시키는 방법이었어요. 저도 경남상고 감독할 때 이 방법을 써 먹었어요. 투수들 제구가 굉장히 좋아졌죠.”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투수가 야구를 시작해 처음 배우는 변화구가 커브다. 그렇기에 대개 누구나 던지는 커브이지만, 제대로 던지는 이는 드물다. 팔 동작이 속구와 반대로 틀어야 해서 궤적과 제구 등을 의도한 대로 던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죠. 그런 과정에서 완성된 거는 맞는데, 동원이가 손 감각이 아주 좋았어요. 손에 동전 같은 것을 딱 쥐면 이게 몇 개인지 감각적으로 알 정도로요. 그런 감각적인 요소도 있으니까 커브를 잘 던진 것 같아요.” 안병환 전 스카우트의 말이다.

윤학길 전 롯데 퓨처스 감독은 “최동원 선배는 볼 배합 등이 능한 한문연과 배터리를 이루는 걸 선호했다”라고 밝힌다. 그만큼 최동원의 공을 가장 오랫동안 많이 잡아본 이가 한문연 전 코치다. (사진=롯데 제공)

한문연 전 코치 역시 같은 의견이다. “제가 볼 때는 감각이죠. 감각인데 제일 큰 요소는 속구든 변화구든 릴리스 포인트가 일정했어요. 그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에서 최동원 선배가 조절을 할 줄 알았죠. 그래서 강하게도 던졌다가 아주 느리게도 던졌다가, 그런 걸 잘했어요. 또 지금 생각해 보면 팔 높이도 조절해서 커브를 던졌어요. 원래 높은 타점에서 던지는 거, 즉 위에 아래로 떨어지는 게 있었고, 팔높이를 조금 내려서 던지는 것도 있었어요. 그건 (오른손 타자) 몸 쪽에서 횡적 변화를 일으켰어요. 팔높이도 조절해 던질 정도로 감각이 좋았던 거죠.”

안병환 전 스카우트도, 한문연 전 코치도, 최동원의 커브가 남들과 달랐던 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각도가 큰 데다가 구속이 빨랐다”라고 입을 모은다. 한문연 전 코치는 커브와 관련한 만화와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제가 동아대학교에 있을 때죠. 최동원 선배가 다니는 연세대랑 연습 경기를 했어요. 최동원 선배의 커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니까, 어느 타자가 높은 쪽 속구였는데, 공이 떨어질 줄 알고 점프하면서 배트를 휘두르면서 삼진을 당했어요. 또 다른 타자는 눈으로 커브 궤적을 쫓다가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했어요. 우선 하늘에서 날아오니까 위를 쳐다보다가 공이 뚝 떨어지니까 급하게 머리를 숙이게 되잖아요.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고꾸라진 거죠. 그만큼 커브 낙차가 컸고 빨랐어요.”

낙차가 큰 커브. 즉, 최동원은 12시에서 6시 방향으로 떨어진다고 해서 ‘12-to-6 커브’(혹은 드롭 커브)를 던졌다. 그 원형은 어디에 있을까. 안병환 전 스카우트는 “일본 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에이스였던 호리우치 쓰네오”라고 봤다.

“부산에서는 일본 방송이 나와서, 일본 프로야구를 볼 수 있었어요. 그걸 녹화한 비디오가 동원이 집에 정말 많았어요. 그중에서도 그 당시 요미우리 에이스인 호리우치 영상을 자주 봤어요. 호리우치 체격이 크지 않고, 동원이랑 비슷하고 해서 많이 참조했겠죠. 요즘 선수들이 메이저리거 타격폼이나 투구폼 등을 참조하는 거랑 같은 거죠. 집에서 연습할 때도 아버님이 동원이한테 팔을 크게 휘둘러라고 자주 말했어요. 호리우치가 그렇게 던졌거든요.”

호리우치 쓰네오는 1966년에 요미우리에 입단해, 13연승을 포함해 16승을 올리며 신인왕과 사와무라상을 받는 등 요미우리가 일본시리즈를 9연패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현역 은퇴한 1983년까지 통한 203승 139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감독을 3차례나 맡았다. 현역 시절 호리우치의 트레이드 마크가 12 to 6 커브였다.

최동원의 커브 그립이나 던지는 방식에 대해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그렇기에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호리우치의 방식을 통해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호리우치의 커브 그립은 가운뎃손가락을 바깥쪽 실밥 위에 걸치고, 엄지손가락은 안쪽 실밥 아래를 잡는 형태였다. 그리고 던질 때 요령은 손목을 90도로 굽히고, 속구처럼 공을 릴리스한 후에도 벨트까지 강하게 휘둘렀다. 최동원 또한 마찬가지다. 커브를 던질 때도 팔을 속구처럼 힘차게 휘둘렀다.

사직 구장 정문 출입구가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최동원 동상. 전성기 때 팔높이와 비교하면 좀 낮지 않느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높은 타점에서 공을 던졌다. (사진=롯데 제공)

최근 투수와 비교하면 누구와 닮았을까. 한문연 전 코치는 “KIA에서 은퇴한 김진우가 그나마 비슷했다”라고 밝힌다. “커브가 빠른 점에서 비슷해요. 다만 팔높이가 다르죠. 김진우보다 훨씬 높았으니까요. 전성기 때는 거의 귀에 붙어서 팔을 휘두르는 것 같았거든요. 그만큼 타점이 높으니까 타자의 눈에 혼동도 많이 생긴 거죠. 김진우는 팔높이가 낮지만 낙차 폭도 컸죠. 그래도 낙차 폭만 보면 최동원 선배가 더 컸다고 생각해요.”

안병환 전 스카우트는 최동원의 커브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게 못내 아쉽다고 밝힌다. 단순히 낙차가 큰 커브만은 아니었다는 것. “토론토가 동원이랑 계약하려고 했던 것도, 동원이의 빠른 공보다 커브가 뛰어난 데 있었어요. 140km/h 중후반을 꾸준히 던지는 빠른 공이 당시 메이저리그 평균 이상이었지만, 구속만 본다면 더 빠른 투수도 있었어요. 근데 그렇게 (평균 이상의 빠른 공을 던지면서) 빠르고 낙차 큰 커브를 던질 줄 아는 투수는 거의 없었어요. 사실 토론토뿐만이 아니었어요. 메이저리그 여러 팀에서 관심을 가졌어요. 다들 커브에 홀딱 반했어요.”

역사에도, 야구에도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과거의 전설’을 떠올리면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만약 1981년에 최동원이 메이저리그에 갔다면, 혹은 KBO리그가 좀 더 일찍 출범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국야구사의 많은 부분을 다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문연 전 코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동원 선배의 전성기는 프로 때가 아니에요. 대학 시절, 연세대에 다닐 때라고 봐야겠죠.”

최동원 전 한화 퓨처스 감독의 12주기를 맞이해, 하늘에서 장효조 전 삼성 퓨처스 감독을 상대로 마음껏 일대일 승부를 펼치며 서로 환하게 웃는 모습들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