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빈층 탈출하고 싶었다.." 전재산 10만원 들고 가출하자마자 데뷔했는데 대박난 가수

늘 청순한 얼굴로 무대에 섰지만, 그 이면엔 아무도 몰랐던 지난날의 고생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강수지의 가족은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강수지는 “미국 나이 16살, 아무것도 없이 뉴욕에 갔다”고 털어놨다.

학교에서는 극빈층 대우를 받았고, 점심은 무료급식으로 연명했다. 흑인 친구들조차 밥을 사 먹던 시절, 그는 그조차 어려웠다.

맨해튼 42번가의 관광 기념품 가게, 야채가게, 네일살롱…수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특히 야채가게는 지금도 떠올리기 힘든 장소였다. 점심시간에도 앉을 수 없었고, 사장이 건네준 건 퉁퉁 불은 라면 한 그릇뿐이었다.

“창고엔 바퀴벌레가 날아다녔다”는 말에서, 그때의 공포와 피로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슴 아팠던 기억은 어머니였다.

할렘가 근처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범죄로 가득한 동네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 “정신나간 여자”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머리를 헝클이고, 중얼거리며, 일부러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던 엄마의 모습은 강수지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이 해코지할까 봐 그랬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너무 마음 아팠어요.”

1988년, 강수지는 우연히 한인 가요제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MC였던 송승환과 인연이 닿았고, 이 만남이 전환점이 됐다.

이후 한인 방송국 DJ를 맡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가수의 꿈이 조금씩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강수지는 가족을 뉴욕에 남겨둔 채 한국행을 결심한다.

“아빠한테 그냥, 나 갈게… 그렇게 말하고 100불만 들고 서울로 왔어요.”

손에 있던 건 오직 송승환의 전화번호 한 장.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송승환은 이렇게 말했다.

“잘 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송승환은 프로덕션을 꾸려 강수지의 데뷔를 준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이 바로 1990년의 ‘보라빛 향기’.

데뷔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청순한 이미지로 사랑받는 가수가 됐다.

강수지의 데뷔 앨범은 윤상이 편곡을 맡은 첫 번째 정규작으로도 유명하다.

‘보라빛 향기’는 히트를 쳤지만, 가요 프로그램 1위는 하지 못했다. 변진섭, 신해철, 이승철 등 내로라하는 발라드 가수들이 가요계를 장악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수지는 ‘보라빛 향기’, ‘흩어진 나날들’, ‘시간 속의 향기’ 등 수많은 명곡을 남기며 짧은 시간 안에 정상급 가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2집 활동 중엔 숏컷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꾸며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청순가련형 여가수 이미지의 전형을 깨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그렇게 그는 4년 만에 다시 부모님과 재회할 수 있었다.

한참 늦게서야 가족을 만났지만, 그 시간만큼 더 단단해져 있었다. 인터뷰에서 강수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난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여자 친구들이 날 안 미워했으면 좋겠어요. 알고 보면… 좋은 여자예요.”

모든 사진 출처: 이미지 내 표기

Copyright © by 뷰티패션따라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컨텐츠 도용 발각시 저작권 즉시 신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