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냥 행복하지 만은 않은 이야기]

“심연을 들여다보지 마”

영화 <아네트>에서 주인공 헨리 맥헨리가 딸에게 해준 마지막 조언이다. 헨리는 심연을 들여다 본 결과로 아동 착취범이자 살인자가 되어 구치소에 수감된다. 심연은 이처럼 인간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무의식이 의식보다 정신분석의 영역에서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심리상담이나 최면치료 등에서, 내가 알고 있는 문제보다 모르고 있는 문제가 지금의 정신적 취약함에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생각하면 심연을 들여다보아야만 어떠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심연을 들여다보면 무너지고,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영화 <언더 더 스킨>의 장면들을 소개하며 하나씩 풀어가도록 하겠다.

(*아래 내용부터는 영화 <언더 더 스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표면은 껍질이고, 심연은 껍질 안쪽이다. 여자는 인간을 먹는 외계인이다. 숲에 외계인이 내린다. 예쁜 여자의 껍질을 주워서 착용한다. 도시로 나오더니 남자를 하나씩 잡아먹는다. 희생양이 된 남자들은 모두 여자의 껍질을 보며 다가오다가 화를 당한다. 그러던 중, 껍질에 문제가 있어서 심연이 조금은 드러나는 어떤 곰보를 만나게 된다. 여자는 곰보를 미처 잡아먹지 못한다. 그 뒤로 여자의 삶은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번지게 되며, 영화에서는 이를 상징적으로 심연의 드러남으로 묘사한다. 눈동자 – 성기 – 온몸 순서로 피부 아래의 것들이 드러난다. 여자는 곰보를 풀어준 이후로 처음으로 자신의 눈을 본다. 그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비로소 성기 안쪽을 본다.

심연의 덩어리인 온몸의 피부가 벗겨지는 시점은 더욱 드라마틱하게 묘사된다. 여자는 다시 숲, 즉 자신의 인간적 삶이 시작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이전의 여자는 숲에서 예쁜 여자의 껍질을 갖기 위해 사람을 죽였으나, 이번에는 자신이 희생양이 된다. 숲의 관리인 하나가 여자의 외모를 보고 달려들어 여자를 강간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대하자, 여자의 껍질이 찢어지고 시커먼 피부 아래가 훤히 드러난다. 숲의 관리인은 그 모습을 보고 낯설어 도망치다가, 아이에 태워버리고자 불을 지른다. 여자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고, 여자의 진짜 몸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영화에서는 껍데기가 아닌 그 안쪽의 무언가를 직면하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라 묘사되고 있다. 여자는 곰보를 보았을 때에 자신의 눈동자를 보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 자신의 성기를 보았고, 숲의 관리인 때문에 온몸을 보았다. 여자가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인간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심연을 들어내니 사람이 도망쳤고, 겁먹은 자는 그것을 태웠다. 앞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무너지고,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몇 가지 사고실험을 해볼 차례이다.
1. 영화에서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둘은 함께 지하 동굴을 들어간다. 동굴 또한 심연의 이미지로 쓰인 셈이다. 여자는 동굴에 들어가기를 무서워하나, 남자가 손을 잡아주며 “천천히 와도 돼”라 말한다. 여자는 그 말에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씩 조심히 걸어 내려갔고, 마침내 지하 동굴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숲의 관리인에게 피부가 벗겨지는 것은 한순간 일어난 일이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때문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심연과 나의 거리를 천천히 조절하는 것이 한 가지 대안은 아닐까?

2. 그러나,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고 하더라도 상대와 나의 관계에 따라 심연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숲의 관리인이 천천히 여자의 피부를 벗겨냈다면 놀라지 않았을까? 그 사람은 여자를 사랑한 것이 아닌 여자의 껍데기만 보고 달려든 사람이기 때문에 시간을 충분히 가졌더라도 여자의 심연을 낯설어 할 것이 분명하다. 여자가 사랑하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놀라긴 했겠지만 도망가고 불태우진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다.

나의 심연이든, 상대의 심연이든,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본모습’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누군가의 본 모습을 보고 도망치지 않으려면 충분한 시간과 사랑이 필요하다. 심연을 들여다보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찾아냈으나,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바로 ‘사랑하는 대상에겐 천천히 다가갈 수 없음’에 있다. 그것이 에로스적인 사랑일 때에 특히 그렇다. 대상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고, 대상에게 나를 투신하고 싶었던 경험이 다들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 에로스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에게 천천히 다가감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 균형을 잃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심연에 의해 파괴되지는 않을까?

답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답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의 영역이 아닌 경험의 영역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모든 것을 알게 됨과 아무것도 모름의 사이,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 어떤 대상에게 투신의 경험도, 또한 천천히 다가간 경험도 있는 사람만이 이 균형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투신만 해 본 사람에겐 시간을 가지는 훈련이, 천천히 다가가기만 해 본 사람에겐 투신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심연을 기꺼이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글쓴이 - 영원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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