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꿀 수 없던 시대, 1930년대 경성이 보낸 답장 ‘팬레터’ [고승희의 리와인드]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의 교과서
1930년대 경성 시대 문인들 무대로
서사와 감정 담은 노랫말 들리는 기적
![뮤지컬 ‘팬레터’ [라이브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18/ned/20260218151549036tyrd.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리하여 삭막한 이 도시에도 조금은 낭만과 예술이 남기를…”
1930년대 경성, 근대는 일제의 동의어였다.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문명이 일본군과 함께 밀고 들어왔다. 극단적 양면이 공존하던 공간, 근대는 기이하고 신비로웠지만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미츠코시 백화점(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에서 내려다본 근대식 자동차는 ‘발광어류의군집이동’(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 중)으로 적혔고, 13명의 아해들은 그 모든 것이 무서워 내달렸다. 그 끝이 막다른 골목이었음에도.
조선인의 정체성이 말살되던 암흑기, 그 시대 문학계엔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문단을 지배해온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이하 카프)은 문학을 계급 투쟁과 정치 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다. 1931년, 1934년 일제의 검열로 카프는 무너졌고, 이 땅의 문학은 정치적, 사회적 목소리를 잃었다. 그 무렵 구인회(九人會)가 결성됐다. “문학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인 작가들이다. 김유정, 이상, 이태준, 김기림, 김환태, 그리고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인 박태원이 구인회의 멤버였다.
뮤지컬 ‘팬레터’(2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 시국에 한가하게 문학 타령이냐”며 시대적 소명이 어깨를 짓누르지만,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던 문인들의 이야기다. 꿈꿀 수 없던 시대, ‘경성’의 작가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창작을 넘어 사라져가는 조선어를 잃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서 자아와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뮤지컬 ‘팬레터’ [라이브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18/ned/20260218151549353yofc.jpg)
구인회를 모티프로 태어난 뮤지컬 속 ‘칠인회’와 문인들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다. 주인공 김해진과 이윤은 소설가 김유정과 이상을 모델로 삼았다. 구인회 동인으로 짙은 우정을 나눴던 두 사람은 나란히 지독한 폐결핵을 앓았고, 삶의 끝자락을 향할 때도 그의 손은 원고지로 향했다. 이상은 김유정에게 ‘동반 자살’을 제안했지만, 생과 창작을 향한 강렬한 열망으로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결국 1937년 봄, 김유정은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이상은 그로부터 20일 후, 도쿄에서 2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이들의 관계는 김해진과 이윤으로 변주돼 극의 골조를 세우되, 곳곳에 허구를 가미했다. 정해진 비극 안에서도 낭만과 웃음, 예술의 가치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뮤지컬의 탄생은 ‘한 통의 편지’에서 기인한다. 한재은 작가는 김유정의 미완성 유작 ‘생의 반려’ 속 일부 내용을 ‘팬레터’에도 인용했다. ‘생의 반려’는 짝사랑하는 기생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친구를 둔 화자가 누이동생의 필적을 빌려 대신 답장을 적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김유정의 짝사랑 경험이 바탕이 된 소설이다. 그는 죽기 전 한 여성(박봉자)에게 서른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김해진에게 날아온 팬레터로 옮겨졌다.
뮤지컬은 김해진과 소설가 지망생 세훈이 주고받은 편지가 발단이 된다. 세훈은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고 해진에게 같은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다. 세훈의 부캐이면서 가상의 인물인 19세 소녀 히카루의 편지는 해진에게 ‘나의 슬픔을 온전히 헤아리는 유일한 존재’이자 ‘글을 쓰게 만드는 절대적 이유’로 자리하게 된다.
![뮤지컬 ‘팬레터’ [라이브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18/ned/20260218151549695fbep.jpg)
“아직 소설을 더 쓰고 싶다”며 김유정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문학적 성취를 갈구했던 것처럼, 해진은 히카루라는 ‘뮤즈’를 통해 창작 동력을 얻는다. 죽음을 앞둔 육체의 고통을 잊을 만큼 강렬한 동인이었다. 극중 7인회의 네 멤버는 김해진이 ‘뮤즈’를 만났다며 이렇게 노래한다.
“뮤즈, 달콤하고 뮤즈 잔인해 영감을 주고 생명을 빼앗아 가는 그들은 잔인한 천사, 그러니 누가 그들을 감히 거부하겠는가 (중략) 내 모든 걸 잃어도 좋으니 오늘 밤 내 창가에 찾아와 주오”
예술가에게 ‘창작’은 언제나 ‘고독한 행위’다. 언어를 부정당하는 시대의 작가들은 끊임없이 ‘나의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는지 자문해야 했다. ‘팬레터’는 예술가들의 근원적 외로움을 ‘팬레터’라는 매개로 극대화한다. 세훈이 해진에게 쓴 편지는 열혈 독자가 보낸 찬사가 아닌,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시대의 아픔을 짊어진 두 영혼이 문학을 매개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순수’라는 이름의 투쟁은 ‘뮤즈’의 탄생과 구원으로 이어지고,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강력한 창작 엔진이 된다.
이 뮤지컬은 주인공들처럼 철저하게 ‘언어의 힘’으로 무장한다. ‘팬레터’의 미덕은 촘촘하게 이어지는 밀도 높은 서사와 연출에 있다. 히카루라는 가상의 존재가 실체를 갖고 무대 위에 등장하는 만큼 뮤지컬은 자칫 유치한 판타지로 흐르기 쉽다. ‘팬레터’는 그러나 꼼꼼하게 채워 넣은 스토리에 시대상과 당대 문인들의 명문장을 통해 설득력을 더했다.
‘팬레터’의 모든 넘버는 이 서사를 든든하게 뒷받침한다. 각각의 노래가 스토리의 연장이며, 상황의 자세한 설명이다. 여기에 곳곳에 인물들의 내밀한 고백이 더해져 감정을 극대화한다. 사실 뮤지컬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나, 유독 ‘팬레터’의 넘버가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배우들의 뛰어난 딕션에 있다. 문학적 비유가 가득하면서도 스토리를 전개하는 노랫말들이 놀랍도록 정확한 딕션으로 관객의 귀에 박히니, 극에 대한 몰입도가 절로 높아진다.
![뮤지컬 ‘팬레터’ [라이브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18/ned/20260218151549987yteh.jpg)
‘아무도 모른다’에서 해진이 쏟아내는 고독, ‘뮤즈(Muse)’에서 칠인회가 노래하는 예술에 대한 광기, 세훈의 ‘고백’을 거쳐 해진의 마지막 편지인 ‘내가 죽었을 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곡은 단순히 멜로디의 향연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적 궤적을 그리는 정교한 설계도였다. 여기에 그림자를 통한 연출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뮤지컬을 매혹적으로 만들고, 히카루와 세훈이 마주보고 자아의 주인이 되려는 장면을 표현하는 안무는 직관적이면서도 도발적이다.
해진과 히카루의 마음을 단지 ‘사랑’이라는 뭉뚱그린 추상에 가두는 것은 게으른 정의다. 해진과 세훈은 서로를 알아본 사람이자, 그토록 원했던 단 한 명의 위대한 독자였으며, 그로 인해 끊임없이 쓰게 만드는 강력한 동력이었다.
뮤지컬의 후반부, 세훈은 해진의 죽음 이후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편지를 읽는다. 해진은 세훈이 히카루라는 필명 뒤에 숨긴 섬세한 감수성과 천부적인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사람이었다. 해진은 “그녀를 닮은 섬세함과 떨림”을 지닌 세훈에게 “나보다 훨씬 용감한 너”라며, 세훈 안에 숨은 재능에 귀한 생명수를 뿌린다. 평범한 청년 안에 잠들어 있던 예술가적 영혼에 숨결을 불어넣은 행위다. 해진의 인정을 통해 세훈은 비로소 히카루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해진의 마지막 고백은 그렇기에 더 숭고하다.
하나의 영혼이 다른 영혼을 구원하고 재능을 이어가게 하는 문학적 전수의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훈은 해진의 위로를 머금고 과거의 상처를 흉터로 남기고 나아간다. 해진이 죽음으로써 소설을 남겼다면, 세훈은 그 소설을 통해 살아남아 다음 시대를 기록하는 작가가 된다. 이 ‘순환의 고리’ 자체가 예술의 본질임을 말하는 뮤지컬이다.
![뮤지컬 ‘팬레터’ [라이브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18/ned/20260218151550357fxzh.jpg)
극의 말미 등장하는 노래 ‘내가 죽었을 때’는 1930년대 암흑기를 지나온 모든 문인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2026년의 모두를 향한 치유의 손길이다. 술렁이는 수많은 밤들을 거닐며 나를 온전히 읽어줄 한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은 1930년대나 2020년대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눈 떴을 때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대지는 척박하고 바람은 거칠었다, 뿌리를 잘못 내린 듯 아무도 축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봄은 아름다웠다 (중략) 하루해 살이풀처럼 내 사랑이 죽었을 때 내 청춘도 죽었고 차마 돌아보지 못했던 나의 봄을 이제야 보낸다.” (‘내가 죽었을 때’ 중)
2016년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의 작은 무대에서 시작된 ‘팬레터’는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의 교과서다. 현재 예술의전당에서의 성공적인 10주년 공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오는 3월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702석)에서 이어질 앙코르 공연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 무대 역시 10년 공력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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