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비행 때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한다. 여행은 자주 가지 못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시간이 문제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헤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소니의 WH-1000XM3 모델이다. 애인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이지만 어쩌다보니 지금은 거의 내가 쓰고 있다. 풍부한 저음과 선명한 해상도와 ‘아이유 헤드폰’으로 알려졌지만, 발매 당시엔 노이즈 캔슬링이 마케팅 포인트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주변 소음을 차단하는 강력한 노이즈 캔슬링.
작년엔 일 때문에 비행기를 자주 탔다. 한두 달 간격으로 몰타, LA, 뉴욕, 도쿄 등에 다녀왔다. 강력한 노이즈 캔슬링은 그때 꽤 유용했다. 노이즈 캔슬링은 공항’적’인 단어다. 비행기와 어울리는 단어다. 휴가철에 어울리는 단어다. 즐거운 시간과 페어링된다.
지금 나는 ‘노이즈 캔슬링을 위한 플레이리스트’(https://bit.ly/3Dv6Zdk)를 만든다. 당신은 여행 중이거나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혹은 출장을 가거나. 그러니까 이 글은 멀리 떠나는 사람에게 보내는 글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다.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빈틈이 많다. 내 기억에 좋았던 여행은 꽉 채워진 일정을 따르는 대신 듬성듬성 어설피 엮인 시간의 틈을 우연히 발견한 것들로 가득 채웠던 순간이다. 이 플레이리스트의 빈틈은 여러분이 채우게 될 것이다.
Alexandre Tharaud – 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 I. Moderato
나는 비행기를 탈 때는 작은 책 하나를 가져간다. 어렵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은 책. 그 중엔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라는 책이 있다. 알렉상드르 타로가 쓴 에세이다. 그는 피아니스트다. “나는 무중력 상태로 여행한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멈춰 서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극장과 호텔방만 방문한다. 그리고 날아다닌다. 내 여행 가방은 활짝 열리는 적이 없다.”라는 문장과 함께 전 세계 투어를 다니는 솔리스트의 삶을 얘기한다. ‘가장 이상적인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알렉상드르 타로는 장 필립 라모 헌정 음반 <Suites de clavecin>으로 크게 주목받았고, 이후 전 세계 투어를 다니는 솔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은 라벨과 쇼팽이지만, 정작 나는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한다. 몰타행 비행기에서 9시간 동안 그의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다. 물론 중간에 잠들기도 하고 기내식도 먹었지만, 노이즈 캔슬링을 굳이 끄진 않았다.
Alexandre Tharaud – Gnossiennes: n° 5 / Erik Satie
그리고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 알렉상드르 타로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티는 해석되지 않는다. 그는 거부 속에서 스스로를 해방한다. 우리는 사티를 얘기하지 않는다. 그가 하도록 내버려 둔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해석할 의도를 비치면 그는 움츠러 들고 무대 뒤로 달려가 숨는다. 무대 위에서는 애정을 갖고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그가 쓰다듬어주기만을 기다리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솔리스트는 티베트 승려가 된다.”
Trygve Seim – Kyrie
트리그베 자임은 노르웨이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다. 20개 이상의 앨범을 발표하며 ECM 레코드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꼽히는 그는 심도 깊은 소리를 만든다. 들이쉬고 내쉬고. 요즘 나는 필라테스를 하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매우 힘겹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한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엔 나도 모르게 들이쉬고, 내쉬고. 조금 숨을 참았다가 후우 내뱉는다. 아주 미묘하게, 신기하고 놀랍게도 우리는 이 세심한 소리를 헤매지도 않고 잘만 따라간다.
Ex:Re – Romance
포스트록 밴드 도터의 보컬 엘레나 톤라의 솔로 프로젝트 ‘Ex:Re’다. 이 앨범은 반복과 공허를 위한 음악이다. 이별과 그 후의 빈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엘레나는 이 앨범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이 앨범이 이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 관계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 사람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유령 같은 존재예요.” 이별이 어떤 건지 실감할 수 있는 문장이다. 떠나기 때문에 남은 것들을 바라 본다. 여행이 일상을 만든다. 부재가 실재를 반영한다. 우리는 그걸 반복한다.
Pure Bathing Culture – Dream The Dare
한 10년 전에는 이렇게 듬성듬성한 사운드를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포틀랜드의 인디 밴드 퓨어 배씽 컬쳐는 강력한 멜로디로 듣는 사람의 귀를 사로잡는다. 나는 한 밤 중에 태평양 어디쯤을 건널 때 이 음악을 들었다. 이탈리아 아래 쪽에 있는 작은 섬 나라 몰타에 가는 길이었다. 옆 자리에는 독일어를 쓰는 어린 아이가 앉아 있었다. 나보다 ⅓ 정도 되는 몸집의 아이가 안전 벨트를 메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행기의 어둠 속에서 멜로디가 반짝거렸다. 지금도 이 음악을 들으면 그때의 기분이 떠오른다.
Son Lux & Moses Sumney – Fence (Official Audio) |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손 럭스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다. 이 밴드는 사운드 디자인을 정말 잘한다. 여기에 모세스 섬니의 얇디 얇은 목소리가 얹힌다. 이 소리는 자칫하면 산산조각 깨질 것 같은 유리컵같다. 조심조심 다뤄야 한다. 이성복 시인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란 시집에서 “거의 무늬 뿐인 잠자리 날개와 거의 구멍뿐인 새들의 가슴뼈, 외딴 골짜기나 깊은 강가에서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당신의 영혼은 더욱 가벼워진다.”라는 문장과 겹쳐서 들으면 매우 좋을 것 같다.
제인 버킨 – Yesterday Yes a Day (madame claude, 1977)
다음 곡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제인 버킨의 ‘예스터데이 예스 어 데이’다. 이 노래는 어제와 이별하고 오늘을 만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별과 만남이 어떻게 깔끔할 수 있을까. 미련과 후회와 기대가 뒤섞인다. 어제는 어제일 뿐이지만 과연 우리는 그걸 어떤 어제로 만들까. 비행기 좌석에 앉으면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뭔가 일 비슷한 걸 해야할 것 같은데 나는 왜 여기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the innocence mission – On Your Side official video
이노센스 미션은 2005년부터 시작해 아직까지도 여전히 좋아하는 밴드다. 놀랍게도 아름다운 멜로디에 아름다운 목소리(그야말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지만 정말 놀랍게도 음악적 평가를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사실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다. 그러나 카렌 페리스의 이 목소리는 집중해서 들으면 어쩐지 영적인 인상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 노래를 책상에 앉아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듣는다. 제발 나를 어딘가 멀리 데려가 달라고 조르고 싶은 마음이 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adrianne lenker – anything
애드리안 렌커도 비슷한 부류다. 헤드셋 너머로 윙윙거리던 소음이 노이즈 캔슬링으로 마법처럼 사라지고 이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갑자기 나는 평화로운 숲속으로 이동한다. 애드리안 랜커는 빅 씨프(Big Thief)의 보컬로 2000년대의 미국 인디 씬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솔로 앨범에서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질감을 표현한다. 때론 거칠고 때론 섬세하다. 나는 이 곡의 만들다 만 것 같은 분위기를 좋아한다. 완성되기 직전의 어떤 망설임. 조금 더 보탤까 말까, 뺄까 말까를 고민하는 어떤 순간이 묻어 있고, 우리도 늘 그런 고민을 한다. 언제든 자신있게 ‘이게 딱 좋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계획은 늘 역량보다 넘치고 결과는 언제나 기대에 못 미친다.
Keith Jarrett – The Wind (Live At Salle Pleyel, Paris / 1988)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피아노 공연 실황 앨범’으로 꼽힌다. 그 앨범을 들을 때마다 영감을 받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콘서트 앨범은 1988년의 파리 콘서트를 녹음한 앨범이다. 이 앨범은 키스 자렛의 38분 짜리 즉흥 연주로 시작한다. 제목은 “1988년 10월 17일”이다. 그가 파리에서 콘서트를 한 날이고, 이 연주가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두번째는 미국의 재즈 작곡가 러스 프리먼과 제리 글래드스톤의 “The Wind”를 연주한 트랙이다. 키스 자렛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곡을 자신의 앨범에 포함시킨 트랙. 이 음악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마감한다. 분주한 인트로가 끝나면 평온한 프레이즈가 지속된다.
알렉상드르 타로는 이런 글을 썼다.
“이따금 나는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마주치는데, 악보를 팔에 낀 채 다가오는 콘서트만 응시하는 그들은 대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처럼 바쁘다. 우리도 우스운 동물이다. 우리는 재빨리 “잘 지내? 뭘 연주해? 언제? 곧 전화하자!”를 주고받는다. 그러곤 몇 년 동안 서로 보지 못한다. 저마다 제 뜀박질을 하느라 바쁘다. 저마다 임박한 콘서트에 따라 산다. 어떤 이는 깊이 잠들고, 어떤 이는 웃는다. 어떤 이는 죽도록 긴장에 시달린다. 나는 침대에서 기다린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도 내 카톡 친구들과 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상에 앉아 헤드폰의 노이즈 캔슬링을 켜고 이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재생한다. 여러분은 그러지 마라. 비행기 좌석에 앉아 이 음악을 들어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