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아녜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가 나는 곳
양구 펀치볼 마을 사과 농부 이야기
여름이 점점 길고 더워지면서 전국 과일재배 지도가 북상하는 추세다. 청송, 영주 등 경상북도에서 주로 재배됐던 사과 재배 지역도 강원도로 옮겨가고 있다. 사과는 아한대 기후에 적합한 과일로, 서늘한 환경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 마을은 새로운 사과 재배지로 각광받는 지역이다. 고지대에 발달한 분지 지형으로, 마치 거대한 화채 그릇(punch bowl)같이 생겨서 펀치볼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었다. 높은 곳에서 관망하면 마을 전체가 거대한 사과 바구니처럼 보인다.
후발주자지만 맛은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양구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고랭지의 찬 기운을 인고하며 야무지게 덩치를 키운 과육이 기분 좋게 씹힌다. 펀치볼 마을의 사과 농부들은 “양구 사과가 낯설어서 망설여진다면, 일단 먹어보고 판단하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펀치볼 마을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는 혜인농원의 안덕근 농부(65)와 강원농장의 심정석 농부(71)를 만나 양구 사과 재배기를 들었다.
◇딸을 국가대표로 키운 은인같은 사과
안덕근 농부의 귀농기는 ‘이곳이 고향이고, 가업을 물려받았다’는 레퍼토리와 거리가 멀었다. 30여년전 중장비 사업을 했던 그는 수해복구차 양구에 방문했다가 동네 인심에 반해 이곳에 말뚝을 박았다. 동네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두 아들과 딸은 사과처럼 예쁘게 자랐다. 막내딸은 최근 -57kg급 태권도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이 소식이 알려진 날 펀치볼 마을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기념 현수막을 걸어줬다. 안 농부는 “지역의 기운이 신묘한데다 사람들이 따뜻해 좋은 사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 농부는 12년 전 우연한 계기로 사과 재배에 입문해 현재 해발 700m 1만1000평(3만6363㎡) 규모의 땅에 5000여 그루의 사과 나무를 키우고 있다. 아오리, 홍로, 부사, 황금 사과 등 6종의 사과를 취급한다. 그를 만난 10월 중순은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다.
그는 이 지역의 사과가 타 지역 사과보다 당도가 높고 육질이 단단하다고 말했다. 지리와 기후적 이점 덕분이다. “일교차가 커야 사과의 당도가 올라가는데요. 펀치볼 마을은 아침과 밤의 기온이 10~15도 이상 나는 지역입니다. 게다가 고랭지라 기온이 낮아서 병충해가 적은 편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일주일 주기로 농약을 치지만 이곳에서는 많아야 한 달에 한 두 번 주면 됩니다.”
서리 맞은 늦가을 사과 부사가 한창인 요즘 하루 300~500kg의 사과를 처리한다. “5월 중순에 사과나무에 꽃이 피면 그때 수정을 합니다. 부사 같은 경우 열매를 약 180일 가량 키워야 하죠. 덩치만 커졌다고 끝이 난 게 아닙니다. 수확기가 다가오면 햇빛을 막는 이파리를 자르고, 사과가 볕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과실을 돌리는데 오랜 시간을 쏟아야 하죠. 사과 하나 재배하는 데 손이 열 번 갑니다.
펀치볼 마을에서 사과 잘 키우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고전했어요.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일교차가 심해서 냉해를 입고 당황하기 일쑤였죠. 첫 5~6년은 시행착오의 시간이었습니다.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과잉 생산으로 애써 키운 농작물들을 밭에 버릴 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농자금이 바닥나고 빈털터리가 된 적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웃들이 나서서 도와줬습니다. 이들의 온정에 용기를 얻어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사과와 양구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시래기, 산마늘 농사로 매년 2억원 안팎의 매출을 낸다. 농사를 시작했을 때보다 농지는 3배 이상 늘렸다. “노력한만큼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맛있는 사과를 만들어서 소비자에게 보내는 게 제 꿈입니다. 농사꾼에게 뭐 다른 게 있을까요. 앞으로 30년 더 과수원을 지키는 게 목표입니다. 95살까지 농사하고 싶어요.”
◇대기업 대신 과수원을 택한 1세대 사과 농부의 아들
심정석 농부는 사과 농사 경력 28년의 베테랑이다. 고향이 대구인 그는 한때 대기업 직장인이었다. 30대 초반에 유명 제약회사의 경북사무소장으로 승진했을 정도로 잘 나갔다. 하지만 일제 시대때부터 사과 재배 기술을 배운 ‘1세대 사과 농부’인 아버지를 따라 40대 중반에 귀농했다. 사과 하나로 10남매를 번듯하게 키운 아버지 모습에 귀감을 얻은 덕이다.
19년간 경북 청송에서 사과를 재배했던 그는 9년 전 펀치볼 마을로 이주했다. 현재 해발 600m 이상 고지에 위치한 4만5000평(14만8760㎡) 규모의 과수원에서 여름사과인 아오리와 썸머킹, 홍로, 부사 등을 키운다. 농사가 잘 된 해엔 15억원, 잘 안될 때는 7~8억원의 연매출을 거둔다. 평균 10억원 안팎의 매출을 내며 사과로 성공한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중이다.
그를 펀치볼 마을로 이끈 건 관광버스 기사의 한마디였다. “10년 전부터 10월만 되면 홍로를 못 팔게 하더군요. 사과는 온도에 민감한데, 기후가 나날이 따뜻해지니까 유통이 가능할만큼 품질이 안나오는 게 원흉이었습니다. 홍로가 사과 중에 제일인데 이걸 못 파는 상황이 납득가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양구를 오가는 관광버스 기사가 ‘양구에선 10월에도 홍로가 제철 과일 같더라’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듣고 공판장에 가니 양구 지역의 사과가 다른 지방 사과의 2배의 가격으로 거래되더군요. 여기서 과수원을 하면 노후 보장은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청송 과수원을 정리하고, 그동안 번 돈을 몽땅 투자해서 양구에 정착했습니다.”
청송에 있었을 때 13년 동안 전국에서 가장 수취가를 높게 받은 과수원으로 선정될 정도로 실력 있는 농부다. 하지만 기후변화 앞에선 장사가 없었다. “사과는 영하 35도 환경에도 살아남는 아한대성 기후에 적합한 과일입니다. 이 환경을 벗어나면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사과의 씨앗에 양분들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데요. 이 힘이 15도~23도 환경에서 극대화됩니다. 만약 25도를 넘으면 양분을 당기는 힘이 떨어집니다. 생육기인 여름철에 열대야가 계속되면 양분을 충분히 끌어들이지 못해 사과 품질이 떨어집니다. 일교차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열대야가 길면 그 마저도 의미가 없어요. 양구는 전국이 열대야로 들썩일 때도 밤 기온이 23도 이상 올라가지 않아요. 대신 꽃 피는 철에 냉해를 주의해야 하죠.”
부사가 한창인 요즘 하루 13t의 사과를 처리할 정도로 바쁘다. “농부는 하늘이랑 동업하는 사람이에요. 환경이 따라주면 잘 되고, 그렇지 않은 해엔 가슴앓이를 하며 내년을 기약해야 하죠. 오랜 기간 사과를 키웠지만 저만의 노하우 같은 건 없습니다. 대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농민 대상의 교육은 빠짐없이 나가요.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고, 다른 사람들이 농사하는 걸 참고하면서 발전해 나가죠. 어느 한 요소 때문에 농사가 대박이 나는 일은 없습니다. 기본을 지키되, 여러 변수가 맞물리면서 커 가는 거죠.”
아들에게 과수원을 물려주고 85세에 은퇴할 계획이다. “사과는 제 수입원이자 노후 대비책입니다. 회사원일 때 성실하게 일한 덕에 진급도 빠르게 했지만 늘 피로했어요.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삶이 쉽지 않았죠. 이 일을 하면서 정신적인 피로를 덜었습니다. 지금 저는 행복하고 평온합니다. 아들에게 과수원을 물려줘서, 사과가 제게 준 선물을 자식에게도 선물하고 싶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됩니다
두 농부가 애지중지 키운 사과는 농산물 전문 유통사인 대화농산을 거쳐 대화농협으로 출고된다. 대화농협은 양배추, 감자, 브로컬리 등 야채를 전문으로 유통했다. 하지만 사과 값이 오르고, 강원도가 사과 산지로 주목받으면서 작년 11월부터 강원도 부사로 사과 유통을 시작했다. 강원도 양구와 평창 등 고랭지에서 키운 사과를 취급한다. 강원도 사과 물량이 폭증할 것에 대비해 선별기 등의 인프라 확충 작업을 하고 있다.
입고된 사과는 당도, 육안, 크기 선별을 거쳐 포장 후 하나로마트와 온라인몰 등에 유통한다. 선물용, 일반 소비용, 식자재 용으로 용도를 나눠서 포장한다. 170g에서 250g의 과실이 주류다. 부사는 저장성이 좋아서 특수 처리하면 이듬해 5~6월까지 먹을 수 있다. 저장된 부사를 소진하면 여름 사과가 출하되고 이후 홍로, 노란 사과가 차례로 나오다 부사철이 돌아오니 1년 내내 사과를 먹을 수 있는 셈이다.
두 농부는 양구 사과의 매력이 멋이 아닌 맛에 있다고 강조했다. “저희 고장의 사과는 별로 예쁘진 않아요. 서리에 살짝 긁힌 자국이 있는 과실도 더러 있죠. 다른 지역의 사과와 비교했을 때 못생겨 보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먹으면 알아요. 당도가 높고 식감이 아삭해 아주 맛이 좋습니다. 자연이 채워준 양분은 거짓말하지 않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됩니다. 사람과 똑같아요.”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