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Glacier, No water! 스위스 알레치 빙하 마주하기

조회 1092025. 2. 20.

갓 태어난 지구에는 수억 년 동안이나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데, 지구에 첫눈이 온 건 언제였을까? 눈이 내리지 않는 지구는 우주에서 날아온 온갖 먼지와 돌덩어리가 부대끼고 깨지는 펄펄 끓는 용광로였다고. 억 단위의 시간이 흘러서야 대기와 수증기가 만들어지고 씩씩대던 지표에 비가 내렸다. 지구는 느리게 느리게 평온을 체득해 갔다. 그리고 10억 년. 지구에 첫눈이 왔다. 그때쯤엔 생명체가 생겨났을까? 지구 첫눈을 바라보던 생명체는 어떤 두려움과 황홀함에 빠져들었을까?? 우주에서 날아온 혜성도, 갓 피어난 수증기도, 두렵고 황홀하게 첫눈을 바라보던 생명체도 인간 상상 저편에 있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상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 내린 첫눈은.


1만 8천 년 전이라던가, 최후의 빙하기가 알프스 꼭대기에 꿈틀대는 거대한 빙하를 남겨두었다. 그것은 상처의 기록이었다.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간 상처에 눈이 쌓이고 얼어붙어 빙하가 되었다. 제 몸을 누르는 압력에 땅과 맞닿은 부분이 녹아 물이 되었고, 경사를 타고 흐르던 융빙수는 스위스, 프랑스 평원을 두루 지나 지중해에 닿았다.

빙하도 자신의 융빙수 위를 아주 살살, 인간이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지구적 호흡으로 아주 천천히 미끄러진다. 빙하가 움직이며 땅에 남긴 상처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되고, 끌고 내려온 퇴적물은 생물의 서식지가 되었다. 그 식생을 찾아 인간이 빙하 골짜기에 모여 샘을 만들고 그것을 둘러싸고 마을을 이루었다. “No glacier, No water. 빙하가 없으면, 물이 없어요.” 알프스에서 가장 큰 알레치 빙하에 가기 전 사전 지식 탐방 삼아 들른 World Nature Forum, 자연 박물관에서 안내하시는 분께 들은 말이다.

ⓒGabriel
빙하는 비와 눈을 얼려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스위스의 물 저장소라고 생각하면 돼요. 봄이 되면 빙하 아래가 녹아 물이 흘러요. 겨울철에는 눈을 흡수하고 여름날에는 물을 내보냅니다. 빙하가 없으면 물이 없어요. 빙하가 녹으면 지구 전체에 큰 고통을 줄 거예요. 지구 온도가 2℃ 높아지면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수십억 사람들의 삶터가 물에 잠기게 돼요.

캐나다와 미국의 기록적인 빙하 손실, 북극과 유럽의 빙하 유실. 2016년 이후 심각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히말라야, 티베트 빙하. 남서풍이 반복적으로 불어오면서 알프스 빙하까지 날아와 쌓인 사하라 사막 먼지가 태양 에너지 반사량을 감소시킨다. 빙하를 덮은 먼지는 빛을 흡수하여 온도를 높이고, 지구는 온도 조절에 애를 먹는다. 사하라 먼지에 서식하던 유해 세균과 미생물, 예를 들어 잎에 그을음병을 일으키는 그을음병균 같은 것들이 봄이 되면 눈 녹은 물을 타고 주변 식물에 스며든다. 알프스 빙하가 대량으로 녹게 되면 얼음에 갇혀 있던 병원균들이 풀려나 지구 탄소 농도를 높이고, 주변 생명체에 거대하고 무서운 영향을 끼친다. 2℃, 인류의 마지막 보루.

빙하가 만들어진 이후 지구의 온도는 계속해서 변화해 왔지만 빙하가 대규모로 후퇴했거나 사라진 건 지난 100년의 이야기다. 이제 50년도 남지 않았다. 빙하가 없으면 육지 생명 절반이 사라진다.


융프라우 저편 산 정상에서 역동적으로 굴곡져 내려오는 하얗고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해발 2,333m 무스플루(Moosfluh). 알프스 최대의 빙하 계곡인 알레치 아레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첫 번째 전망대다. 빙하 협곡을 바라보며 걷는 트레일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아래 2,227m 지점에 호플루(Hohfluh)가 있지만 빙하가 무스플루 위까지 녹는 바람에 시시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2,647m의 베트머호른(Bettmerhorn)까지 걸어 올라갔다가 숙소가 있는 베트머알프로 내려갈 계획이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무스플루 전망대 ⓒGabriel
무스플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레치 아레나 빙하

베트머호른은 지금 시점 빙하를 바라보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이다. 알레치 빙하 탐험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도 있다고 하는데, 시점을 앞당겨 말하자면, 매우 기괴했다. 그러니까 브리그역에서 내리지만 나테르스 시에 있는 자연 박물관(WNF)은 알레치 빙하에 오기 전 꼭 들러야 할 곳이다. 1층 유기농 아이스크림 판매장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기는 하지만.

가장 높은 2,868m 에기스호른(Eggishorn)은 빙하가 꿈틀대며 하강하기 시작하는 융프라우를 가까이 바라볼 수 있지만 빙하의 유려한 굴곡을 바라보기에는 아래 두 장소보다 부족하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2만 원짜리 신라면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그 융프라우는 안개만 없다면 베트머호른에서도 볼 수 있다.

무스플루 승강장 아래 빙하 호수

한때 길이 30km, 깊이 900m라고 소개되던 알레치 빙하는 2024년 카탈로그 기준 20km에 가장 두꺼운 콩코르디아플라츠 광장(Place de la Concordiaplatz)의 깊이가 800m라고 소개되어 있다. 10년 사이 10km, 100m가 줄었다.

인간으로서 참으로 면목 없는 데이터만 속출하는 와중에 인간적인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무스플루에서도 컵라면을 판다. 융프라우에서 파는 라면과 동일 제품으로 가격은 14프랑, 2만 원 정도. 빙하가 햇빛을 산란하는 찬란하게 감성적인 풍경과 복사평형이라는 이지적인 순간을 동시에 마주하게 되면 먼저 사진을 찍기 마련이고, 문득 렌즈 없이 눈으로만 바라봐야 할 것 같은 디지털 디톡스 해탈에 이르러 명상 비슷한 숨소리를 낸다. 그래도 뭔가 더 하고 싶고, 해야만 할 것 같은데 할 게 없다. 이럴 때 라면 면발을 후후 불어 김 너머로 아른거리는 재색을 겸비한 빙하 파노라마를 목격하고, 라면 국물에 코를 가까이 대고 콧방울을 데우며 감격에 찬 듯 훌쩍이면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No glacier, No water. 알프스 빙하에 융해된 라면 국물이다.

여름날 차양 같은 저 차갑고 순정한 표면이 다 사라지고 나면 지구가 다시 치즈가 펄펄 끓는 퐁뒤 냄비가 된다는 거다. 퐁뒤 냄비를 생각하면 컵라면에 담긴 국물만큼 지구적 경이와 우려가 들끓는 풍경을 위로해 주는 존재도 없다. 14프랑은 조금도 의아한 가격이 아니다.

걱정은 걱정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지구의 첫눈 흔적 앞에 놓고 온다.

지구가 얼고 녹은 거대한 상처는 생명의 발원지가 되었다. 상처는 생명을 만들었고, 상처받은 생명은 알프스에 돌탑을 쌓으며 생명을 기원한다. 알프스에서 만나는 돌탑은 바람, 소망을 평지로 안고 가려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걱정, 불안을 남겨 놓고 떠난 흔적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지구의 첫눈, 장엄한 시간의 사원 앞에 당신의 미미한 걱정 따위 놓고 가시라는 쓸쓸한 다독임.

2016년 10월 무스플루 산사태는 빙하가 점진적으로 얇아지며 일어났다. 알레치 빙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묵는 마을이자 외국인이 상상하는 스위스 목가 풍경 그대로인 리델알프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빙하의 지속적인 쇠퇴로 1990년대 이래 계속해서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다. 산사태가 일어나기 전 하루 80cm까지 미끄러지는 날도 있었는데, 알프스에서 관측된 최대 속도라고 한다. 빙하가 빠르게 이동하면 경사면에 균열을 일으키고 낙석과 작은 산사태가 일어난다. 2022년 7월 3일 이탈리아 돌로미테에서는 얼음과 암석이 무너지며 산악인 11명이 매몰되고 일반 등산객 13명 실종되었다.

빙하의 후퇴는 2050년까지 비교적 점진적인 속도로 계속될 것이지만, 2100년에는 사라질 거라고 한다. 탄소배출 경각심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일대 전진을 멈춰 세우기엔 때가 늦었다. 2℃가 높아지면 지구는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2℃, 인간은 무얼 해야 할까? 2℃ 상승 이후의 지구 풍경 역시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우주적 변화겠지만, 바라보는 주체가 어떤 생명체일지, 그건 우리 상상력 저편에 있다. 그들이 생애 첫눈을 바라보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까.


베트머호른에서 보는 지구의 한때는 좀 더 웅장하다, 이건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고, 나는 짙어진 안개 때문에 기괴한 인형이 초점 안 맞는 눈동자를 흔들며 알레치 빙하 탐험 역사를 말해주는 박물관을 ‘귀신의 집’ 통과하듯 후다닥 지나 안개가 걷히길 바라는 마음을 돌 조각에 담아 두고 하행 케이블카를 탔다.

안개 말고는 볼 수 있는 게 없었던 베트머호른

늦가을 스위스 샬레의 테라스를 장식하는 알펜로즈를 다정하게 지나 베트머알프 마을 알프프렌드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이 호텔 식당 저녁 메뉴가 와인 퐁뒤 코스라 하는데, 꾸덕한 식빵을 끓고 있는 와인 소스에 적셔 먹는 음식이라 한다.

베트머알프 ⓒGabriel

샤워를 하고 알프스 수돗물을 한 잔 마신 뒤 저녁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호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시켰다. 바 안에는 손이 매우 크고 이마와 눈가 주름이 포근하고 멋스럽게 자리 잡은 스위스 남성이 혼자 등산복을 입고 발레주 라거를 마시고 있었다. 손과 맥주잔에 비해 얼굴은 매우 작았다. 알레치 빙하를 보고 온 소감,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그가 제주도를 다녀왔다는 것, 그의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이 이 호텔 레스토랑에 공급된다는 정보 교환을 라거 한 잔 들이켤 숨 가쁜 시간 안에 마치고 그가 만들었다는 sol 와인을 주문했다.

ⓒGabriel

그는 내가 지나쳐 온 스위스 장소들을 물었고, 나는 경외와 애정을 담아 지역 이름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일일이 대답을 하다 보니 어쩐지 옮겨 다니기 급급한 관광객 같아 보여 알프스를 걷고 나서 알프스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고 했다. 세상 여러 곳을 걷고 그 마을 맥주를 마시는 것이 나의 여행이라는 헛바람 든 감성 표현. 그도 나처럼 술을 찾아다니던 끝에 결국 자신의 와이너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 증거가 우리 눈앞에 있다. 나는 한국인 특성상 전날 술을 많이 마시면 아침에 숙취 해소 음식을 먹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술을 한 잔 더 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이곳 발레주 사람들은 해가 일찍 지는 산악 지역 사람들이라 해가 지고 나면 술을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데, 그 바람에 한때 발레주에서는 저녁에만 술을 마실 수 있는 법이 생겼고, 이후 발레주 사람들은 아침 인사조차 굿 이브닝이라 한다고 했다. 굿 이브닝이면 언제든 술을 마셔도 좋은 때니까요. 당해 낼 사람이 아니었다.

ⓒGabriel
베트머알프 마을

그가 만든 와인 한 병을 함께 비우고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해야 하나 주저하던 차 호텔 주인이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 건배를 하며, 오늘 대화에 알맞은 결론, No glacier, No water를 다시 들려주었고, 나는 이제야 그를 대적할 만한 말을 떠올렸다고 생각했다. 만나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No glacier, No beer.

호텔 창에서 맞은 베트머알프 마을의 아침

글·사진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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