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용 독서면 어때? 디올백보다 낫잖아" 물 만난 '텍스트 힙' 확장될까

이현주 2024. 10. 2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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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활자 예찬하는 역설
뉴진스 등 유명인 따라하기가 출발
일각에선 "지적 허영 과시다" 비판
전문가들 "독서 열풍, 나쁠 것 없다"
유행에서 문화 정착으로 확장돼야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서울야외도서관 광화문책마당에서 시민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뉴스1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린 22일 밤 10시,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어둑한 바(Bar) 안으로 들어섰다. 벽면 책장마다 판매용 또는 열람용으로 가득 들어찬 책들, 시선을 잡아끄는 글귀가 빼곡한 칠판, 손으로 꾹꾹 눌러쓴 필담이 적힌 메모지들, 고전문학의 이름을 딴 칵테일들이 나열된 초록색 양장본 메뉴판, 군데군데 켜진 전등불 밑에서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 심야의 독서가들, 그리고 그 속에서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는 내 모습.

'읽는 것은 멋지다'는 뜻이 담긴 '텍스트 힙'(Text+Hip)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추천을 받고 서울 마포구 망원동 '책바'를 찾았다. 술과 함께 독서와 사유, 창작을 할 수 있는 이 공간의 주요 고객층은 인근 대학생들을 비롯한 2030세대라고 한다. 요즘 텍스트 힙을 문화로 향유한다는 세대층이다. 정인성 책바 대표는 "여기에선 칵테일 메뉴를 읽는 것부터가 독서의 시작"이라고 소개했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의 등장인물들이 마시는 압생트를 섞은 칵테일 '달과 6펜스'나,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Camus)의 성과 같은 브랜디 카뮈를 넣은 칵테일 '이방인' 등을 즐길 수 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책바' 내부 모습. 술과 독서를 함께 즐기면서 '텍스트 힙'을 구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현주 기자

'읽는 것=멋지다' 등식, 어디서 시작됐나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 동안 책을 1권도 읽지 않는(성인종합독서율 43.0%·2023 국민독서실태조사) 지독하게 책 안 읽는 나라에서 활자를 추앙하는 역설은 어떻게 태동했을까. 전문가들은 K팝 아이돌 등 유명인들의 '독서 인증'이 텍스트 힙 열풍에 불을 댕겼다고 분석한다. 뉴진스 멤버 민지가 뮤직비디오 속에서 이디스 워튼의 고전소설 '순수의 시대'를 읽고 있는 장면이나, 아이즈 멤버 장원영이 휴식 시간에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책이나 논어를 읽는다고 밝힌 인터뷰 등이 젊은 세대의 독서 욕구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유튜브 등 영상 매체가 대세인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와 레트로에 가까운 활자가 되려 신선함을 가져다준다는 분석도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카세트 테이프, CD 플레이어, 비디오, 카메라 같은 예전 물건들을 인증하는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게 한때 유행이었던 것처럼 일반적인 것과 다른 자기만의 개성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활자나 책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룹 '뉴진스'의 멤버 민지가 뮤직비디오 '버블검'에서 고전소설인 '순수의 시대'를 읽고 있다. 유튜브 채널 'HYBE LABELS' 캡처

텍스트 힙은 지적 허영을 과시하는 문화다?

텍스트 힙은 한편으론 이미지로 표출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등 SNS에 자신이 읽은 책 사진을 게시하는 방식 등이다. 엑스(X)에선 아예 수십 권의 책을 굴비처럼 엮은 '과시용 독서' 목록이 회자되기도 한다. '있어 보이려면' 이런 책들 정도는 읽어줘야 한다는 친절한 권고다. 때문에 텍스트 힙이 진정한 독서 문화의 정착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며, 이를 허세나 허영으로 보는 마뜩잖은 시선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활자 예찬이 허세일지언정 나쁠 것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소설가 황석영은 8월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해 '연예인을 따라 무작정 고전을 읽어도 될까'라는 방청객의 질문에 "좋은 거다. 디올백보다 낫잖아"라고 단언했다. 강동호 문학평론가는 "나 자신을 확인하고 표현하려는 욕망이나 좀 더 멋진 것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다 허세가 들어가 있다"면서 "이런 허세는 문화를 더 확장시키고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한 시민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책을 여러 권 구매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석영의 말대로 명품 소비처럼 큰돈을 들여 유행을 좇는 것보다는 책 소비가 훨씬 더 유익하고 평등하다는 관점도 있다. 강 평론가는 "책은 다른 여타 문화예술 상품에 비해 저렴하고 사회적 계층과 무관하게 진입장벽이 훨씬 더 낮다. 도서관이라는 아주 훌륭한 제도도 갖고 있지 않나"라며 "한국 사회는 뭔가 하나가 유행하면 획일적으로 따라하거나 그 안에서 위계를 만들어내는데, 책이 사람의 가치와 삶의 품격을 보여주는 매체로 받아들여진다면 좀 더 다양성이 존중 받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책 안 읽는 나라...바뀔 수 있을까

성인 종합독서율 추이. 2013년 이후로 급락세를 그리고 있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다만 아직까지 특정 세대의 일시적 유행에 국한돼 있는 텍스트 힙 문화가 세대 간에 지속적으로 확대되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 지난해 성인종합독서율은 20대에서는 74.5%였지만, 40대는 47.9%, 50대는 36.9%로 떨어지는 등 고연령대일수록 독서율이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10대들은 활자보다 영상 매체에 더 익숙한 디지털 세대라는 점도 독서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기 요인으로 꼽힌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지금도 아이들은 활자에서 멀어지고 있다"면서 "이들이 독서에 자연스럽게 입문할 수 있는 '마중물 책'들이 다양하게 출판돼야 한다. 이렇게라도 독자를 키워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자라서 저절로 책을 읽는다고 기대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 작품이 100만 부가 넘게 팔렸는데, 우리나라 현재 출판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라면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답게 독서율을 끌어올리는 자각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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