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어 피자 메뉴 같은 요즘 아파트 이름 근황

이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이름들인데 그라시움, 루센티아, 루체하임, 리센츠, 에스티움…. 딱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단어 수십 개가 나열돼 있다.

영어에 독일어, 심지어는 라틴어?까지 짬뽕처럼 섞이는 경우도 있고, 에디슨과 링컨, 아인슈타인처럼 위인전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까지 마구잡이로 끼워 넣는 탓에 아파트 이름이 열 몇 글자씩 늘어지는 건 흔한 일이 됐다. 유튜브 댓글로 “아파트 이름들이 왜 이렇게 길고 복잡한 건지 알아봐달라”는 의뢰가 취재했다.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이름이 긴 아파트는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빛가람 대방엘리움 로얄카운티 1차/2차’. 단지 구분을 뺀 순수 명칭만 23글자로 1조4170억원을 들여 만든 지방 신도시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를 아파트 공식 네이밍에 무리하게 붙이려다 보니 길어졌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
“왜냐면 지역(명)을 살려야 되니까. 혁신도시냐 혁신도시 아니냐도 이게 집값에 영향을 준다고 시장에서 판단을 하거든요. 정확하게 몇 프로 주느냐 안 주느냐 이거를 따질 수는 없지만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 영향을 사실 주고 있는 거는, 그거는 누구나 수긍을 하거든요”

결국 있어 보이는 브랜드나 명칭으로 집값을 끌어올리려는 입주자와 건설사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건데, 이런 허세 같은 작명법이 처음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부터다.

곳곳에 신도시가 생기고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주거 공간을 차별화하려는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런 수요에 발맞춰 대형 건설사를 중심으로 ‘래미안’ ‘e편한세상’ ‘푸르지오’ 같은 브랜드가 속속 도입되기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나 이런 브랜드마저 익숙해지자 별도의 의미를 담아 브랜드에 추가하는 별칭, 펫네임까지 붙기 시작한 거다.

요새는 아파트의 입지적 특징을 고려해 펫네임을 짓는 게 유행인데 근처에 학교나 학원가가 있으면 ‘에듀’나 ‘캠퍼스’, 공원이 있으면 ‘파크뷰’, 바닷가가 가까우면 ‘마린’ ‘포세이돈’이 들어가는 식이다.

이름이 한층 복잡해진 데는 건설사가 합작해 짓는 대단지 컨소시엄 아파트가 늘어난 영향도 있다. 롯데건설과 SK에코플랜트가 공동 시공한 광명시 ‘철산역롯데캐슬&SK뷰클래스티지’는 지명에 브랜드만 붙였는데도 16글자다. 이러다 보니 아파트 단지명 평균 글자 수는 1990년대 4.2에서 2000년대 6.1, 2019년 9.84글자로 끝없이 길어지고 있다.

근데 길고 복잡한 외계어 같은 명칭을 만들면 정말 돈이 되긴 할까? 오래된 아파트 이름을 인지도 높은 브랜드로 바꿨더니 단기적으로 7.8%의 프리미엄이 집값에 붙어 거래됐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걸 보면 사람의 욕망이란 게 참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거 같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
“가장 큰 건 사실 소비자들의 니즈예요. (소비자들이) 왜 이걸 또 원했냐 살펴보니 결국에는 이러한 것들이 아파트 주택 가격, 부동산 가격에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치더라는 거죠”

서울, 특히 강남을 중심으로 다른 동네와 다른 고급스럽고 차별화된 명칭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면서 하나의 건설사 안에 여러 브랜드 라인업이 우후죽순 생겨나기도 했다. 원래 ‘현대홈타운’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하던 현대건설이 2006년 고급 주거단지라며 ‘힐스테이트’를 런칭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
“힐스테이트 브랜드가 생겨난 이유가 뭐였냐면 한창 강남을 중심으로 해서 재건축 아파트들을 수주하는 수주 경쟁이 일어났었습니다. 강남 사람들한테 똑같은 강북에서 쓰는 홈타운이라는 이름을 너희들도 쓰게 한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은 아니야, 너희들은 다르기 때문에 너희는 강남이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새로 우리가 만들어서 붙여줄 거야, 그렇게 접근한 거거든요. 그래서 탄생한 게 힐스테이트에요”

현대건설은 이어 2015년에 초초초고급 프리미엄 브랜드라며 강남과 한강변 일부에만 적용되는 ‘디에이치(THE H)’를 추가로 선보이기도 했다.

아파트 이름이 너무 길고 복잡해 헷갈린다는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서울시는 쉽고 부르기 편한 명칭으로 짓도록 유도하는 걸 검토 중이라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파트 이름 길이부심에 도취된 주민들에겐 씨알도 안 먹힐지도 모른다.

집은 투기목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당연한 진리가 한국에선 웃음거리가 된지 오래다. 한국에서 재테크는 곧 부동산이고, 부동산은 곧 아파트이며, 내 아파트 가격 건드리는 누구와도 일전을 불사를 준비태세가 돼 있는 게 한국인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력의 한계를 초과하는 아파트 이름일지라도 남들과 구별되는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 번 길어진 아파트 이름이 짧아지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