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꺼진 DDP·불야성 상권··· ‘K패션 심장부’의 불협화음 [하상윤의 멈칫]

하상윤 2026. 2. 2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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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을지로 281. 조선의 군사들이 훈련하던 하도감(下都監) 터였으며, 1925년 일제가 성벽을 허문 자리에 ‘경성운동장’으로 태동했다. 해방 후 ‘서울운동장’을 거쳐 1985년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 2007년 철거될 때까지 80여년 동안 서울시민의 함성을 담아냈던 자리다. 2014년 3월, 이곳에 은빛 수은방울 형상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섰다. 완공 후 12년이 흐른 지금, DDP는 다시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최근 한 여당 의원이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며 제기한 ‘DDP 해체 및 돔 아레나 건립‘ 주장은 단순한 정치적 공세를 넘어, 이 거대 공공건축물이 주변 도시 맥락과 맺어온 관계를 다시 주목하게 만든다. 네이버지도

대한민국 패션 산업의 심장부인 동대문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끊임없이 변모해왔다. 과거 동대문운동장이 자리했던 시기, 이 공간은 스포츠의 요람인 동시에 주변 상권과 유기적으로 호흡하는 물류와 소통의 광장이었다. 2014년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건축적 랜드마크로서의 위상은 확보했으나, 동대문 인근의 특수한 환경에서 생성된 상인들의 삶의 방식과 물류 활동의 맥락을 수용하지 못해 주변 패션타운 도소매 상권과의 단절이라는 과제를 낳았다. 특히 소매 상권의 급격한 위축과 이곳 의류 산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도매 생태계의 소외는 대형 공공 건축물이 도시 조직의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부작용으로 지목된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전경.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이 비정형 건축물은 4만 5,133장의 알루미늄 패널이 제각기 다른 각도로 빛을 반사하며 ‘환유의 풍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상윤 기자
2006년 촬영된 동대문운동장 항공사진. 축구장(오른쪽)은 2003년 폐장 이후 내부 시설은 청계천 복원 공사로 밀려난 풍물시장 상인들의 터전이 되었고, 필드와 주변 부지는 패션타운 도매상권의 버스와 화물차를 수용하는 거대 주차장으로 기능했다. 스마트서울맵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한 이래, 1980년대 중반까지 '성동원두(城東原頭, 성 동쪽 너른 들판)'라 불리며 수많은 국내외 경기가 개최됐다. 도시 계획 관점에서 운동장 부지의 중요한 가치는 그것이 지닌 '공간적 유연성'에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동대문운동장은 시설 노후화로 인해 스포츠 경기장의 기능이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오히려 주변 패션타운과의 상업적·도시 생태적 연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동대문운동장은 야구나 축구 경기가 끝난 이후 주변 도매 상가들을 위한 거대한 물류 배후지로 기능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동대문패션타운의 한 도매상가 앞 광장에 전국 각지로 배송될 물건들이 빼곡히 쌓여 있다. 하상윤 기자

30년 넘게 동대문에서 의류 도매업에 종사했던 박중현 전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협의회 회장은 “과거 동대문운동장의 광장 형태 공간은 수천 대의 오토바이와 화물 차량이 드나드는 하역장 역할을 수행했다”면서 “특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늦은 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주변 상가로 스며들어 상권의 활기와 뒤섞이던 소통 구조였다”고 회상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심야 시간, 동대문패션타운 도매상가 일대는 거대한 산업 현장으로 바뀌며 불야성을 이룬다. 하지만 이 엄청난 물동량을 감당할 제대로 된 하역장 하나 없어, 비좁은 길거리 자체가 아슬아슬한 작업장이 된다. 하상윤 기자

실제 자정을 넘긴 심야 시간, 불 꺼진 DDP 너머의 풍경은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의 전쟁터다. 물류 차량이 머물 수 있는 합법적인 공간이 사라진 도로 위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입 차량과 오토바이가 위태롭게 뒤엉킨다. 제대로 된 하역장 하나 없이 길바닥에 산더미처럼 물건을 쌓아두는 전근대적인 ‘노상 적치’는 이곳만의 암묵적인 질서가 된 지 오래다. 사람 키만 한 대형 비닐봉투를 산처럼 쌓은 '밀카(수레)'가 곡예하듯 인파를 뚫고 지나가고, 수레가 닿지 않는 좁은 틈새로는 자기 몸집보다 큰 짐을 짊어진 '지게 아저씨'와 머리에 짐을 인 상인들이 쉴 새 없이 오간다.

상가와 상가 사이를 잇는 골목길. 짐을 가득 실은 밀차(수레)를 끄는 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 밤새도록 빠르게 교차한다. 하상윤 기자
새벽 2시경, 동대문패션타운 도매상가 앞 노상에 임시로 마련된 화물 적치장. 커다란 짐을 어깨에 짊어진 상인들이 줄을 잇는다. 하상윤 기자

이러한 현실에 대해 박 전 회장은 “이곳 도매 상권 종사자만 10만 명에 달하고, 오가는 자본의 규모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연간 6조 원, 그중 중국 수출 물량만 수조 원에 육박할 만큼 막대하다”며 “하지만 정부는 오래되고 독특한 이곳의 거대 산업 생태계를 철저히 외면한 채 아무런 지원도 하고 있지 않다”고 토로했다.

도매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새벽 3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은 인적이 드물다. 심야에 역동적으로 깨어나는 주변 도시와 대조적으로, 이 거대한 공공건축물은 도심 속 '불 꺼진 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하상윤 기자

서울시가 강조하는 연간 1,700만 명, 누적 1억2,600만 명의 방문객 데이터는 DDP가 문화 랜드마크로서 지니는 압도적인 집객력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화려한 통계는 정작 동대문 패션 타운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도매 산업의 리듬과는 격리되어 있다. DDP의 주요 시설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로 고정된 반면, 동대문 패션타운의 경제를 떠받치는 도매 상권은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산업 현장이 가장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심야 시간대, DDP는 모든 기능을 멈춘 채 거대한 ‘어두운 섬’이자 폐쇄된 블록으로 남겨진다. 야간에 활동하는 10만 명의 도매 상인과 종사자들에게 DDP는 더 이상 유기적인 파트너가 아니다.

평일 낮, 인적이 드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내부 모습. 서울시는 연간 1,7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며 주요 성과로 내세워왔다. 이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연간 관람객(약 900만 명)을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하상윤 기자
평일 낮, 인적이 드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내부 모습. 서울시는 연간 1,7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며 주요 성과로 내세워왔다. 이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연간 관람객(약 900만 명)을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하상윤 기자
평일 낮, 인적이 드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내부 모습. 서울시는 연간 1,7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며 주요 성과로 내세워왔다. 이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연간 관람객(약 900만 명)을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하상윤 기자

2007년 DDP 현상설계공모에 참여했던 조성룡 건축가는 “동대문에는 그곳을 기반으로 먹고사는 시민들이 수십 년간 일궈온 독특한 형태의 산업 생태계가 있고, 공공 건축이 지속성을 얻으려면 늘 그 자리에서 공간을 이용하는 지역 사람들의 삶과 이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 건축가는 “이제라도 ‘누구를 위한, 그리고 누구에 의한 디자인센터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며 “단순히 눈을 사로잡는 스펙터클한 오브제 하나를 세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DDP와 동대문패션타운 사이로 장충단로가 가로지른다. 이곳 상인들은 DDP를 기준으로 소매상가가 모여 있는 서쪽을 '서편제', 도매상가가 모여 있는 동쪽을 '동편제'라 부른다. 하상윤 기자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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