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최초 1차지명 송구홍…‘혼의 야구’ 백인천 시대와 결별

[이재국의 엘팬알백] ㉕1991년 희망과 절망…백인천 감독 시대가 남긴 것

1991년 1차지명 신인 송구홍(왼쪽)과 1991년을 끝으로 LG 감독에서 물러난 백인천. ⓒ스포츠서울
“구홍아, 우리가 널 1차지명했다.”

1990년 11월 3일 KBO 사무실. LG 트윈스 정영수 운영과장(스카우트)은 곧바로 건국대 4학년 송구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과장은 송구홍의 선린상고 선배로 MBC 청룡 시절부터 기록원과 스카우트로 활동해 온 인물이었다.

“정말입니까? 선배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릴 때 한국화장품의 슈퍼스타 김재박의 야구에 매료돼 야구를 시작한 송구홍은 김재박의 팀 LG 트윈스에 1차지명됐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990년 프로야구판에 뛰어들자마자 우승한 LG는 국가대표 출신의 최대어 내야수 송구홍까지 1차지명하는 데 성공하면서 내야진 세대교체와 2연패에 대한 장밋빛 꿈을 그렸다.

하지만 세상만사 어디 뜻대로 흘러갈까. 강호의 위치를 굳힐 것만 같았던 LG는 1991시즌 추락을 거듭했다. 급기야 백인천 감독은 시즌이 종료되기 전에 선수단 앞에서 자진사퇴의 뜻을 밝혔고, LG호는 앞을 알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25번째 주제는 1991년의 희망과 절망, 백인천 감독 시대와 결별 이야기다.

1990년 11월 4일자 스포츠서울 기사. LG가 주사위 던지기에서 승리해 대학 최대어 내야수 송구홍을 1차지명했다. 기사 작은 제목에 보이는 삼성 이영재, 태평양 전일수는 현재 KBO 심판위원으로 활약하고 있어 눈길을 모은다. ⓒ스포츠서울

◆국가대표 3루수 송구홍, LG 시대 최초 1차지명

1991년에는 KBO리그에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제8구단으로 창단해 1990년 2군리그를 소화하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1군리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감독 지형도가 대폭 바뀌었다.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사령탑인 김인식 감독이 첫선을 보였다. 잠실 옆집 OB는 전년도 시즌 중반에 중도퇴진한 이광환 감독 후임으로 감독대행을 맡았던 이재우를 정식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삼성은 태평양 사령탑에서 물러난 김성근 감독을 모셔오고, 태평양은 그 자리에 ‘타격의 대가’ 박영길 감독을 영입했다. 8개 구단 중 4개 구단이 새 사령탑 체제로 출발했다.

KBO 신인드래프트 제도를 다시 손질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팀당 연고지 1차지명 선수를 3명씩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엔 2명, 1991년엔 1명으로 축소했다. 전력평준화를 위해 1차지명을 최소화하되, 지역연고제의 상징성 측면에서 1차지명을 1명씩 두기로 결정했다.

어쨌든 LG로서는 최초의 1차지명 선수를 뽑는 것이었다. 1990년 루키 김동수가 LG 창단둥이로 최초 신인왕에 올랐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김동수는 1989년 11월에 MBC 청룡 구단이 1차지명한 선수. 1990년 1월에 MBC가 럭키금성 그룹에 공식 인수되면서 LG로 넘어온 케이스였다.

이에 따라 1991년 신인 대상들은 LG 트윈스로 구단 이름이 바뀐 뒤 처음 지명하는 선수들이었다. 그런 만큼 구단 내부에서도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 지역 연고 선수 중 최대어는 단연 송구홍. 서울 사당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뒤 성남중과 선린상고, 건국대를 거치며 줄곧 엘리트 내야수의 길을 걸어왔다. 중장거리형의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허슬플레이로 이미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했다.

선린상고 2학년 때 고교대표 유격수로 선발되고, 건국대로 진학한 뒤에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붙박이 국가대표 3루수로 활약했다. 건국대 시절 2년 후배 이종범(유격수), 송태일(2루수), 추성건(1루수) 등과 막강한 내야진을 구축했다.

“MBC 청룡부터 LG 트윈스까지 한동안 건대 야구장을 훈련장으로 썼어요. 제가 건국대 다닐 때 연습경기도 종종 했는데 코치님이나 선배님들이 지나가는 말로 ‘우리가 널 1차지명할 거야’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저도 어릴 때 동대문구장에 가서 한국화장품에서 활약하던 최고 유격수 김재박 선수를 보고 야구에 빠졌거든요. 그래서 사당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 유격수를 했고, 김재박 같은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내심 이왕이면 LG에서 저를 1차지명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죠.”

송구홍(현 GD 챌린저스 감독)은 1차지명 당시의 상황을 묻자 마치 건국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신나게 추억 보따리를 풀어나갔다.

LG로서는 노장 유격수 김재박과 3루수 이광은의 은퇴를 준비해야할 시점이었다. 내야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했다. 그 즈음에 때마침 대졸 최대어 송구홍이 신인드래프트 시장에 나왔다. LG는 1990년 11월 3일 KBO 사무실에서 OB 베어스와 서울 지역 1차지명 우선권을 가리는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겼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송구홍의 이름을 불렀다. 송구홍은 계약금 5000만 원(구단 발표 4000만 원)에 사인하면서 줄무의 유니폼을 입었다.

지명 후순위로 밀려난 OB는 덕수고-한양대 출신의 3루수 황일권을 1차지명했다. 빠른 발과 펀치력이 있는 황일권 역시 국가대표 출신으로 기대를 모은 유망주였지만 경력과 명성 면에서는 송구홍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황일권은 1차지명을 받은 뒤 OB와 입단계약 협상을 하면서 억대 계약금을 요구하다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해버렸다. 그러다 2년이 지난 1993년에서야 OB 유니폼을 입었다.

LG 김재박(가운데)이 득점 후 동료인 노찬엽(오른쪽), 김동재 등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김재박은 실업야구 시대와 프로야구 초창기 많은 선수들의 우상이었다. ⓒ스포츠서울

◆“니가 무슨 국가대표 3번타자야?”…손등 골막염으로 초반 결장한 ‘로보캅’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팀 LG에 1차지명된 것만 해도 기뻤죠. 그런데 입단하고 스프링캠프에 갔는데 첫 룸메이트가 누구였는지 아세요? 김재박 선배님이셨어요. 제 어릴 때 우상이었던 김재박 선배님하고 한 방을 쓴다는 게 믿기지 않았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더라고요.”

송구홍은 지금도 흥분되는지 당시 추억을 떠올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LG는 당초 1991년 스프링캠프를 미국 플로리다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해 1월에 걸프전(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촉발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과 이라크 간의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 불안과 유가 폭등…. 걸프전의 불똥이 튀었다. KBO는 정부의 절약 정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각 구단에 해외 전지훈련을 재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LG는 이에 따라 경남 진해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1991년 LG 트윈스 1차지명을 받고 입단한 송구홍이 러닝훈련을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니가 무슨 국가대표 3번타자야?”

백인천 감독은 캠프에서 송구홍의 타격을 보더니 혹평을 했다. 대학 시절엔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해 팔로만 쳐도 강한 타구를 날리고 홈런도 심심찮게 생산했지만 프로에서는 언감생심. 타구가 나가지 않았다.

송구홍은 백 감독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추운 날씨에 무리하게 스윙을 하다보니 왼쪽 손등이 아파왔다. 검진 결과 골막이 터졌다는 진단이었다.

송구홍은 휴식 후 한동안 2군에서 훈련하며 손등 골막염을 치료했다.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던 그는 4월 24일 처음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이날 잠실 빙그레전 8회말 대타로 나서 장정순을 상대로 좌전안타를 때리면서 KBO 1군 데뷔전 신고식을 했다.

그러나 손등 골막염은 시즌 중반까지 그를 괴롭혔다. 날씨가 따뜻해진 여름에 접어들면서 통증이 가셨다. 결국 프로 첫 시즌 73경기에 출장해 타율 0.236(174타수 41안타) 2홈런 18타점에 그쳤다.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로보캅’ 송구홍은 이듬해인 1992년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하며 LG 간판스타로 도약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서울팀 선수 최초 20-20' 이야기 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1991년 개막전에 앞서 애국가를 부르러 온 '가왕' 조용필과 LG 백인천 감독이 인사하고 있다. 둘은 경동고 선후배 사이다. ⓒLG트윈스

◆‘국민가수’ 조용필의 개막전 애국가 해프닝으로 출발한 1991년

LG는 1991년 4월 5일 잠실구장에서 태평양 돌핀스와 시즌 개막전을 맞이했다. LG의 백인천 감독과 태평양의 새 사령탑 박영길 감독은 자타공인 타격의 최고수들이어서 사령탑간 맞대결도 관심을 끈 매치업이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잠실벌을 들썩거리게 만든 일이 있었다. ‘뽀빠이’ 이상용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 행사에서 대한민국 최고 가수 조용필이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LG는 전년도 우승팀 자격으로 이날 KBO 공식 개막식을 치렀는데 행사를 빛내기 위해 조용필을 섭외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용필은 일본 공연 중인 데다 야구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게 쉽지 않아 처음엔 사양의 뜻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G는 조용필이 백인천 감독의 경동고 후배라는 학연까지 동원해 삼고초려 끝에 모셔왔다.

대한민국 최고 가수 조용필이 1991년 잠실구장 개막전에 앞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LG트윈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천하의 조용필이 그만 애국가 가사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바꿔 부르더니 후렴구 ‘길이 보전하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잘못 불렀다.

조용필은 행사 뒤 매니저를 통해 “야구장에서 노래한 것이 처음이어서 너무 긴장했다”고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애국가 실수 해프닝은 ‘가왕’ 조용필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실제로 가수들은 잠실구장에서 애국가를 제창할 때 진땀을 빼곤 한다. 울림이 심해 자신이 부른 노래가 한 템포 뒤에 들리기 때문이다. 2011년 인기가수 김범수도 잠실구장에서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대…느님이 보우하사’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

1990년 선발과 마무리 보직을 바꿨던 정삼흠(왼쪽)과 김용수. 1991년 5월에 정삼흠이 부진하면서 둘은 다시 보직을 맞바꾸기도 했다. ⓒ스포츠서울

◆4월의 순조로운 출발과 5월에 찾아온 고비

4월 5일 개막전에서 선발투수 김용수의 호투 속에 태평양을 5-3으로 꺾었다. 1990년 개막전에서 OB에 2-7로 패했기에 이날 승리는 LG 트윈스 역사상 최초의 개막전 승리로 기록됐다.

이튿날인 4월 6일 태평양 잠수함투수 박정현의 완투에 막혀 1-4로 패했지만 7일 태평양, 9일 롯데에 2연승하면서 3승1패로 쾌조의 시즌 출발을 했다.

4월 16일 잠실 OB전부터 21일 전주 쌍방울전까지 6연승을 올리면서 해태와 함께 10승 고지에 선착했다. 김용수는 시즌 첫 완투승으로 4승1패를 기록하면서 다승 단독 선두로 나섰다.

LG는 24일 잠실 빙그레전에서는 4-2로 승리해 해태를 0.5게임차로 밀어내고 단독 1위에 올라 전년도 우승 군단의 면모를 되찾는 듯했다.

1991년 LG 고졸연고 자유계약선수로 입단한 이우수(왼쪽)와 이종열. ⓒ스포츠서울

더군다나 이날은 앞서 설명한 대로 1차지명 루키 송구홍의 데뷔전과 첫 안타가 터졌고, 고졸 루키 이우수의 데뷔 첫 안타도 함께 나와 더욱 의미가 컸다.

그해 고졸연고 자유계약 선수로 동대문상고 이우수, 장충고 이종열(현 삼성 라이온즈 단장) 등이 입단했는데, 특히 이우수는 청소년대표팀 주장을 지낸 선수여서 차세대 유격수로 키우려고 기회를 먼저 줬던 유망주였다.

하지만 5월 초순 적신호가 켜졌다. 전년도 마무리로 변신해 철벽 소방수로 거듭났던 정삼흠이 5월 5일 어린이날 대전 빙그레전에서 패전투수가 되더니 8일 광주 해태전까지 3연속 구원실패를 하면서 마무리투수로서 기능을 잃어버렸다. 팀은 시즌 처음 4연패에 빠지며 3위로 내려앉았다.

급기야 5월 9일 광주 해태전에서 8-6으로 승리할 때는 다승 싸움을 하던 김용수(5승2패)를 마무리로 투입해 가까스로 연패를 끊었다. 그러나 김용수와 정삼흠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등 마운드의 변칙 승부수에 팀은 더욱 흔들렸다.

LG는 5월 16일 잠실 OB전부터 19일 잠실 삼성전까지 다시 4연패를 하더니 5월 25일 잠실 빙그레전부터 6월 1일 잠실 해태전까지 무려 8연패를 당했다. 23승1무25패. 승률이 5할 아래로 떨어졌고, 팀순위는 8개 구단 중 6위로 급전직하했다.

LG 트윈스 간판타자 김상훈이 삼성전에서 타격하는 장면. 포수는 삼성 이만수. ⓒLG트윈스

◆1990년의 기적은 재현되지 않았다…시즌 막판 연패의 늪

6월 하순 3연승을 거두면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33승1무31패로 5할 승률을 회복하고 포스트시즌 진출 마지노선인 4위를 탈환했다.

이어 후반기 개막 후 6경기에서 5승1패를 거뒀다. 38승1무32패로 2위까지 도약했다. 1990년 6월 3일까지 꼴찌를 하다가 기적의 레이스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반등 드라마가 재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승리하는 날보다 패하는 날이 많았다. 심지어 7월 26일과 27일 잠실 해태전에서 2연승한 것을 제외하면 시즌 종료까지 단 한번도 연승이 없었다.

그 대신 8월말까지 두 번의 5연패와 세 번의 3연패로 침잠했다. 8월 31일 잠실 삼성전부터 9월 15일 인천 태평양전 더블헤더 제1경기까지 무려 10연패를 기록했다.

전신 MBC 청룡을 포함해 1989년 8월에 11연패를 당한 것이 구단 역사상 최다 연패 기록이지만, LG 트윈스 시대만 따지고 보면 이때의 10연패가 지금까지 최다 연패 기록으로 남아 있다.

LG 트윈스 백인천 감독이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김용수(12승11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2.79)와 정삼흠(12승15패 8세이브, 4.18)은 12승씩을 올렸지만 패수가 많았다. 1990년 혜성처럼 등장해 맹활약했던 김태원(8승8패, 평균자책점 4.84)과 문병권(3승13패, 5.15)이 부진에 빠지면서 마운드 전체의 힘이 쇠락했다.

특히 김태원은 8월 3일 빙그레전에서 9이닝 동안 혼자 182구를 던지며 12실점(11자책점)을 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떠안았다. 백 감독으로선 김태원에게 각성하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벌투’를 시킨 것이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팀 분위기는 더 흐트러지고 말았다.

간판타자 김상훈(타율 0.255, 7홈런, 41타점)을 비롯해 타선 역시 전체적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 1990년 신인왕 김동수는 백인천 감독이 타격폼을 수정하기 위해 손을 댔는데 타율이 0.196로 떨어지면서 극심한 2년차 징크스에 시달렸다.

베테랑 김재박은 82경기에 출전해 홈런 없이 0.263에 그쳤고, 이광은 역시 0.271의 타율과 홈런 5개에 머물렀다. 구단으로선 두 슈퍼스타의 은퇴 시점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인천 감독이 1991년 9월 선수단 앞에서 자진사퇴 의사를 전한 사실을 보도한 스포츠서울 기사. ⓒ스포츠서울

◆구단 만류에도…백인천 감독 중도 자진사퇴

“이렇게 떠나게 돼 착잡하다. 후임 감독이 누가 오더라도 일사불란하게 뭉쳐 서울팀 명예를 되찾고 훌륭한 선수가 돼 주기를 바란다.”

1990년 9월 10일 오전 10시. 백인천 감독은 구리연습장에서 사복 차림으로 나타나 박현식 2군 감독을 비롯한 1, 2군 코칭스태프 및 선수 전원을 모아 놓고 공식적인 감독사퇴 선언을 했다. 전날 광주에서 해태에 패하면서 6연패를 하고 상경한 뒤였다.

LG는 이때까지 시즌 52승1무67패로 팀순위 5위였지만 잔여 6경기만 남겨놓고 있는 상황. 4위 롯데(59승3무59패)에 7.5게임차나 뒤져 이미 산술적으로도 포스트시즌 진출이 물 건너간 시점이었다.

이날 백 감독이 자진사퇴 의사를 밝히는 자리에는 12일 미국 플로리다 교육리그를 떠나는 코치 4명과 선수 25명도 참석했다.

LG 구단이 먼저 백 감독을 경질한 것은 아니었다. 백 감독도 LG 구단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자진사퇴 결심을 굳힌 것은 아니었다.

1991년 9월 12일자 스포츠서울 보도를 보면 백 감독이 선수들에게 당부한 이런 코멘트가 나온다.

“내가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했지만 이처럼 구단 지원이 적극적인 팀은 없었다. 이런 구단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것을 큰 복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달라. 과연 스스로들 혼신의 힘을 다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운동장에서 쓰러질 때까지 정열을 불태우겠다는 투철한 직업정신을 되새겨주길 바란다.”

백 감독은 2015년 펴낸 자서전 ‘백인천의 노력자애’에 당시 상황을 기술해 놓고 있다.

자진사퇴의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백 감독은 선수들에 대한 실망감을 꼽았다. 특히 LG 선수들이 판돈을 걸고 노름을 한다는 얘기가 자신의 귀에 들어왔고, 몇 차례 주의를 줬지만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은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한 후반기 어느날, 전주 원정경기 때였다.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돼 연습을 소집했더니 신인급만 나왔다고 한다. 백 감독이 숙소를 덮치니 고참 선수들이 판돈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었다.

백 감독은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지도자로서, 선배로서 회의감을 느꼈다. 선수들이 우승 이후 지나친 자만심에 빠진 데에다, 자신의 말에도 반기를 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결국 감독과 선수간의 신뢰가 붕괴되면서 의욕 상실로 이어졌고, 백 감독도 더 이상 선수들을 이끌어갈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 이후 백 감독은 구단 측에 직·간접적으로 사퇴 의사를 몇 차례 밝혀왔다. 실제로 이날 구리운동장에서 선수단을 소집하기 일주일 전에 백 감독은 태평양과 원정경기를 위해 인천에 머물 때 김종정 사장과 만나 “그만두겠다”는 뜻을 직접 전했다.

김종정 사장은 “시즌 중이니 좀 더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자”며 만류했다. 시즌 종료 후 구본무 구단주와 면담하는 자리도 마련해 놨다.

LG 구단은 당시 메이저리그식 선진 시스템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식 야구를 추구하는 백 감독과는 노선이 다소 다른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백 감독은 LG 구단의 초대 우승 사령탑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었기에 쉽게 결별을 결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백 감독이 1,2군 선수단 전원을 모아놓고 먼저 자진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평지풍파가 일었다. 그는 9월 14일 잠실에서 열린 OB와 홈 최종전에서 패한 뒤 다시 한번 김종정 사장에게 사퇴의사를 전했다.

백 감독은 2군급 선수들을 데리고 15일과 16일 태평양 원정 3경기(15일 더블헤더 포함)를 치렀다. 1군 주전급 선수들과 유망주들은 앞서 설명한 대로 12일 미국 플로리다 교육리그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LG나 태평양이나 의미없는 3연전. LG는 15일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 9-3으로 승리하며 10연패를 끊어낸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그리고는 16일 최종전에서 3-4로 패하며 시즌을 마쳤다.

LG는 1991년 53승1무72패(승률 0.425)를 기록했다. 신생팀 쌍방울 레이더스와 공동 6위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순위표 아래에는 8위 OB 베어스 한 팀밖에 없었다. 사실상 우승 팀이 이듬해 꼴찌로 전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LG 백인천 감독이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고 있다. ⓒ스포츠서울

◆‘혼의 야구’ 백인천 감독 시대가 남긴 것

LG는 이로써 창단 후 첫 사령탑인 백인천 감독 시대를 마감하게 됐다.

백인천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LG는 숱한 롤러코스터를 탔다.

1989년 꼴찌나 다름없는 팀을 맡아 1990년 우승까지 이끈 백인천의 리더십은 실로 놀라웠다.

특유의 해박한 이론과 카리스마로 팀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6월 3일까지 최하위에 있던 팀을 페넌트레이스 1위로 이끌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기적의 레이스였다. KBO 역사에서 6월을 꼴찌로 시작해 우승까지 치고나간 사례는 1990년 LG가 유일하다.

1990년 LG 야구를 두고 ‘혼의 야구’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백인천 감독이 LG 야구에 혼을 심었고, 선수단은 혼이 깃든 야구를 펼치며 우승이라는 값진 열매를 수확했기 때문이다.

LG 야구는 다이내믹했다. 히트앤드런(치고 달리기)과 도루 등 다양한 작전과 공격 루트를 활용하면서 상대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마무리 김용수는 선발로, 선발 정삼흠은 마무리로 변신하면서 막강한 마운드를 구축했다. 미완의 대기에 머물던 김태원은 18승 에이스로 도약했고, 잠수함 투수 문병권은 10승 투수로 거듭나며 경북고 시절의 명성을 되찾았다.

김재박 이광은을 중심으로 한 노장들과 신인왕 김동수, 2년생 노찬엽 등이 어우러진 신구조화 속에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MBC 청룡 시절 한 번도 우승을 보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왔던 서울 팬들은 ‘백인천 야구’에 매료돼 연일 잠실구장을 가득 메웠다.

1990년 LG가 선전하자 팬들이 잠실구장을 찾은 즐겁게 응원하고 있다. ⓒLG트윈스
1990년 LG가 1위 싸움을 전개하자 잠실구장에 입장하려는 팬들이 구장 외곽을 가득 메우고 있다. ⓒLG트윈스

백인천은 한국야구사에서 최초의 기록을 수없이 많이 썼다.

경동고 시절이던 1960년 6월 9일 서울시 춘계리그 휘문고전에서 해방 이후 최초로 서울운동장(훗날 동대문운동장) 홈런을 기록한 주인공이 됐고,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와 계약하면서 재일교포를 제외하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 됐다.

1975년 다이헤이요 라이언스 시절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올랐고,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20년간의 일본프로야구 선수생활을 뒤로 하고 귀국해 MBC 청룡의 초대 감독 겸 선수가 됐다. KBO 역사에서 감독 겸 선수를 지낸 인물은 지금까지 백인천이 유일하다. 원년에 그가 쓴 0.412의 타율은 불멸의 기록으로 평가 받는다.

MBC 청룡 감독 겸 선수 시절의 백인천. ⓒ스포츠서울
뒤늦은 은퇴식. LG는 1990년 9월 29일 정규시즌 최종 경기인 두산전에 앞서 백인천 감독의 선수 은퇴식을 열어줬다. 김재박 이광은 신언호 등 선배 선수들이 주도적으로 의견을 모아 마련한 행사였다. 백 감독은 "이같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해주신 야구계 선후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감격해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서울팀 감독(1982년 MBC 청룡)이었고, 최초의 서울팀 우승 감독(1990년 LG 트윈스)이었다.

그가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이식했던 야구의 기술과 혼은 1990년대 LG가 명문구단으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

LG는 백인천 감독 시절 다져온 ‘혼의 야구’ 토대 위에 ‘자율야구’로 꽃을 피울 준비를 시작한다.

[엘팬알백] ㉖편에서 계속

LG 트윈스 시대 제2대 감독을 맡게 되는 이광환. ⓒLG트윈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