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현동의 낮과 밤, ‘북적임’이 사라진 번화가의 역설
경남 거제시 최대 번화가인 고현동은 상점 밀집과 교통 접근성 덕에 ‘거제의 얼굴’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최근 거리 풍경은 낯설다. 하루 내내 인파의 흐름이 끊기고, 대로변 노른자 상가 유리창에는 임대 안내문이 줄지어 붙었다. “길에 사람이 안 다닌다”, “가게 문 닫는 게 낫다”는 자영업자의 푸념은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과거 점심·퇴근 시간에 몰려들던 직장인과 기술자들의 발길이 느슨해지면서, 매대 회전은 둔화되고 골목의 활기는 공백으로 남았다. 조선업 특수로 고용지표는 개선되었지만, 도심 소비의 체감경기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킨다. 일자리가 늘어도 지갑이 열리지 않는 ‘소비 단절’의 역설이 고현동 한복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용 호조’와 ‘도심 불황’이 동시에 가능한 이유
거제는 국내 조선업의 핵심 거점으로, 글로벌 발주 회복과 친환경 선박 전환 수요에 힘입어 고용이 빠르게 반등했다. 하지만 이 고용이 곧바로 도심 상권의 매출로 연결되지 않는 데에는 구조적 요인이 겹친다. 첫째, 근로형태의 변화다. 협력사·단기·교대 인력이 늘면서 소비 시간대가 분산되거나, 공장 인근에서 해결하는 ‘폐쇄형 소비’ 비중이 커졌다. 둘째, 체류·주거 패턴의 재편이다. 현장 인력의 일부는 기숙사·원룸 밀집지에서 생활 동선을 짧게 묶고, 주말에는 원 거주지로 이동해 외부 소비가 줄었다. 셋째, 물가·금리 상승에 따른 실질소득 압박이 외식·여가 지출을 후순위로 미루게 했다. 넷째, 온라인·배달 플랫폼으로의 지출 이동이 오프라인 특히 번화가 상권의 ‘보행 수요’를 약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는 있는데 손님은 없는’ 기형적 괴리가 도시 전역에서 관찰된다.

옥포·고현, 같은 침체 다른 양상: 현장 인접 상권의 공통 리스크
한화오션 인근 옥포동 상권도 상황은 비슷하다. 공장과 가까운 이점은 점심시간 단체 수요로 작동하던 시절엔 강점이었지만, 지금은 교대제 확대와 사업장 내 식당·편의시설 확충으로 외부 유출이 줄며 약점으로 바뀌었다. 고현동은 쇼핑·금융·행정 기능이 결집됐지만, 대형 상업시설 중심의 목적형 방문이 늘면서 골목형 소상권에 파급이 제한적이다. 즉, 옥포는 ‘내식화·폐쇄화’의 벽, 고현은 ‘목적지 쏠림’의 벽에 막혀 동시 침체가 발생한다. 두 상권의 공통 리스크는 회복탄력성의 부족이다. 특정 대기업·단일 업종 수요에 과도하게 의존해, 근무제·복지체계·발주 사이클의 변동이 바로 매출 쇼크로 전이되는 구조다. 산업이 흔들리지 않아도 운영 방식의 작은 변화만으로 상권은 쉽게 ‘진공 상태’를 맞는다.

“코로나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
자영업자들이 “코로나 때보다 장사가 더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한 체감이 아니다. 팬데믹 시기에는 정책·사회 인식이 ‘위기 극복’에 모아지며 임대료 조정·공공 소비 진작·임시 세제 지원 등 완충 장치가 작동했다. 반면 지금의 침체는 ‘회복 국면’이라는 인식 속에서 지원의 초점이 산업과 고용 유지에 머물러, 지역 상권의 현금흐름 개선으로까지 충분히 파급되지 못했다. 또한 팬데믹 이후 소비 습관은 디지털·비대면으로 재학습됐고, 도심 방문의 명분은 더 강력한 차별화가 없으면 약해졌다. ‘예전처럼’이라는 회복 공식이 통하지 않는 이유다. 이제 상권 회복은 보행 재생, 업종 리밸런싱, 체류 콘텐트 강화 같은 구조적 처방 없이는 어렵다. 위기는 끝났지만, 방식은 바뀌었다. 그래서 체감은 더 춥다.

거제형 해법: 보행·체류·업종 구조를 다시 짠다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산업도시의 특성을 활용해 도심소비의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첫째, 보행 연속성 회복이다. 고현동·옥포동 핵심 축에 차없는 시간대 혹은 저속교통지대를 도입해 안전하고 편안한 ‘점심·퇴근 90분’ 보행 환경을 만든다. 공장과 도심을 잇는 출퇴근 동선에 간이 마켓, 이동형 큐레이션 상점, 현장 특화 간편식·휴게 포켓을 배치해 지출을 ‘길 위’로 끌어낸다. 둘째, 체류 이유를 제공한다. 조선·해양 특화 팝업 전시, 기술 체험·직업교육 프로그램, 야간 소규모 라이브·북토크 등 일을 마친 뒤 40~60분 머물 동기를 만든다. 셋째, 업종 리밸런싱이다. 중복 업종을 줄이고, 혼합 리테일(카페+간단 공구/키트, 숍인숍)을 유도해 낮·밤 수요를 모두 흡수한다. 넷째, 기업·지자체 공동 바우처다. 협력사 식권·생필품 바우처를 ‘도심 지정 가맹점’에서 쓰게 하고, 가맹점에는 결제 수수료 경감·소정 인테리어 개선비를 매칭한다. 다섯째, 숙소·기숙사 연계다. 장기 체류 인력이 주말·평일 저녁에 이용할 ‘동네 쿠폰북’을 숙소 체크인 시 지급해 반복 방문을 촉진한다.

임대·자금·데이터: 3가지 인프라가 회복의 기초가 된다
상권의 생존은 결국 현금흐름과 비용 구조에서 판가름난다. 첫째, 임대 인프라. 공실이 장기화된 점포는 단기·팝업 임대를 활성화하고, 임대료를 매출 연동형(플로어+매출 연동)으로 전환해 초기 위험을 낮춘다. 구역별로 ‘테스트 스트리트’를 지정해 패키지형 리스·공용 설비 지원을 제공하면 신규 창업의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둘째, 자금 인프라. 매출 하락 점포 대상 단기 운영자금의 심사 기준을 간소화하고, 에너지 효율 개선(조명·설비 교체)과 디지털 전환(예약·테이블오더·POS 통합)에 쓸 수 있는 전용 라인을 만든다. 셋째, 데이터 인프라. 출퇴근·점심·주말 보행량을 센서·통신 데이터로 가시화하고, 업종별 매출·체류 시간의 변화를 월 단위로 피드백해 상인회·지자체·기업이 같은 지표를 보고 의사결정하도록 한다. 데이터가 있어야 지원은 정밀해지고, 사업은 중복을 피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기반이 깔려야 상권의 ‘회복 탄력성’이 생긴다.

조선 도시의 다음 질문, ‘일하는 도시’에서 ‘사는 도시’로
거제의 경쟁력은 조선업에서 비롯되지만, 지속가능성은 ‘사는 도시’로의 진화에서 완성된다. 교대제 중심의 시간표만으로는 도심 상권이 버티기 어렵다. 퇴근 뒤 머물고 싶고, 주말에 다시 오고 싶은 이유가 생겨야 한다. 생활 인프라의 균형(육아·문화·공원), 청년·기술인 주거의 질적 개선(직주근접 렌탈, 코리빙), 해양·관광 자원의 스토리텔링(조선 역사와 현대 기술을 잇는 도시 투어)은 모두 소비의 시간을 도심으로 되돌리는 장치다. 무엇보다 기업·지자체·상인이 ‘동선 설계’라는 같은 언어로 협력해야 한다. 산업의 호황이 도심 경제의 호황으로 번역되려면, 사람의 발걸음이 다시 길 위로 올라와야 한다. 고현동의 한산한 낮, 옥포동의 텅 빈 저녁을 바꾸는 첫 걸음은, 도시가 사람의 하루를 얼마나 정성껏 디자인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