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저 팔에 모든 것이 달렸다
처음에는 축구를 했다. 몸이 커서 골키퍼를 했다. 그러다가 함께 축구 하던 친구들이 야구로 넘어가면서 따라갔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취미반으로만 하다가 5학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엘리트 야구의 길로 들어섰다. 2017년 7월2일이었다. 성준서 야구의 시작이다.
선택은 투수밖에 없었다. 포지션 플레이어가 되려면 적어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을 만져야만 한다. 거의 1년 동안은 정규 경기에 단 한 번도 못 나갔다. 키 크고 덩치 큰 6학년 선배가 벤치에만 앉아 있으니 후배들에게 놀림도 받았다.
2018년 8월 속초시장배 리틀야구 대회. 팀(광명리틀) 에이스였던 선수가 리틀 국가대표로 미국에 가면서 드디어 등판 기회가 왔다. 6경기 9와 3분의 1이닝 1실점. 제구가 들쑥날쑥해 볼넷도 많았지만 삼진도 19개나 엮어냈다. 아버지 성왕선씨는 기억한다. “만약 아이가 첫 등판에서 성적이 안 났으면 아마 야구를 관뒀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평촌중 1학년 때인 2019년에는 3월부터 덜컥 팔꿈치가 아팠다. 리틀 대회 때 갑자기 자주 던진 게 화근이 됐다. 같은 해 가을(11월) 검진을 받았는데 오른 팔꿈치 안쪽 뼈가 조각조각 나 있었다. 그 후 9개월을 쉬었다. 중학교 2학년인 2020년 8월까지 공을 한 번도 못 던졌다.
돌아보면, 중학교 시절 등판한 경기는 딱 2경기였다. 구속은 빨랐으나 제구에 어려움이 있어 제구를 잡기 위해 잦은 망투(그물망에 공을 던지며 하는 연습)를 했다. 경기 출전도 못하면서 이른바 ‘입스’(공을 똑바로 못 던지는 것)가 올 것도 같았다. 중학교 시절은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흘러갔다. 3학년이던 2021년 10월부터는 사설 클리닉에서만 훈련했다. 개인 러닝은 매일 이어갔다. 영하 17도에도 혼자서 10㎞를 뛰었다.
경기항공고에 진학했다. 고교 1학년 때 최고 구속으로 시속 148㎞가 찍혔다. 곧 시속 150㎞가 넘을 줄 알았다.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고교 2학년 때 최고 구속은 시속 147㎞. 제구를 잡으려다보니 구속이 줄었다. 유튜브로 메이저리그 영상을 보면서 이것저것 시도해본 것도 오히려 독이 됐다. 경기도 대표로 대만과의 교류전을 다녀온 뒤로는 급격하게 폼이 무너졌다. “제구만 생각하다가 세게 던지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았던” 시기였다.
그래도 초조해지지는 않았다. 조정 과정에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2학년이던 2023년 10월9일 데드리프트를 하던 중 손에 감은 스트립이 풀리면서 바를 놓치는 바람에 보조 막대가 왼쪽 발등을 강타했다. 그때 바벨의 무게는 200㎏이었다. 중족골 골절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수술은 안 해도 됐지만 5개월 동안 러닝도 못하고 공도 못 던졌다. 제일 중요한 고교 3학년을 앞두고 청천벽력이었다. 겨울 훈련을 거의 하지 못하면서 1, 2학년 때보다 구속은 더 줄었다.
3학년 성적은 11경기 등판, 32와 3분의 1이닝 투구, 1승2패 평균자책점 3.66. 성왕선씨는 “(2024년) 8월18일 봉황대기 전주고와의 첫 경기에서 패한 뒤 망했다고 생각했다”며 “올해는 정말 보여준 게 없었다. 그 뒤로 바로 대학 입시 요강과 원서를 알아봤다. 학교별로 입시 서류 봉투 6개를 준비했었다”고 말했다.
“엄마, 오빠 이름 나왔어요”
운명의 날(9월11일)이 왔다. 성준서와 가족들은 각각의 장소에서 2025 케이비오(KBO)리그 신인드래프트 생방송을 지켜봤다. 성준서는 어머니와 함께 집 거실에 있었다. 아버지는 회사 밖으로 나와 혼자 차 안에서 휴대전화 화면만 응시했다. 10라운드까지 호명되자 성준서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도 방송을 껐다. 성준서는 어머니께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둘째 아들의 드래프트에 스트레스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대학 원서 등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켜려는 찰나 방에서 몰래 조용히 혼자 방송을 보던 막냇동생이 거실로 나왔다. “엄마, 오빠 이름 나왔어요.”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휴대전화에는 “축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성준서는 11라운드 110번째, 즉 마지막 순번으로 전년도 우승팀 엘지(LG) 트윈스에 의해 호명됐다.
LG 스카우트 평가에는 “(성준서는) 스리쿼터 팔 스윙으로 공의 움직임이 좋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고 공 끝 힘이 좋아 구속 대비 체감 속도는 더 빠르게 느껴지는 선수”라고 적혀 있다. 사이드암 투수였던 성영재 스카우터의 적극 추천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된 성준서는 말했다. “올해 내 실력의 70%도 제대로 발휘 못했는데, 110번으로 선택된 것은 프로에서 110%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성준서를 비롯한 LG 예비 신인 11명은 2024년 9월25일 잠실야구장을 찾아 코칭 스태프와 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준서는 그날 밤, 야구장에서 입었던 유니폼을 직접 빨아서 널었다. 성왕선씨는 “아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아빠, 이제 나만 잘하면 될 것 같아. 죽자 살자 해서 꼭 1군 선수로 올라갈게’라고 하는데 옛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고 했다.
성준서가 신인 계약금으로 받은 금액은 3천만원. 보통 1~3라운드는 1억원, 4~7라운드는 5천만원 이상, 10~11라운드는 3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게 된다. 프로 첫해 연봉은 3천만원으로 모두 똑같다. 3천만원을 1억원으로, 10억원으로 만드는 것은 오롯이 선수들의 몫이다.
‘LG 트윈스 투수’ 성준서입니다
성준서의 부모는 내년부터 그의 연봉을 모두 저금할 예정이다. 성준서가 부모에게 원한 용돈은 “20만원”. LG 2군 구장인 이천 챔피언스파크에서 합숙하기 때문에 굳이 돈이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한다. 2주에 한 번 집으로 올 생각인데 그때는 부모가 픽업을 가려 한다.
이제 포털 사이트 검색에 ‘성준서’를 치면 ‘LG 트윈스 투수’라고 뜬다. 비록 막차를 탔으나 ‘프로야구 선수’라는 출발점은 모두 같다. 성왕선씨는 아들이 “좋은 사람, 좋은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비롯되니까 마음만 잘 다스렸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프로 지명은 단지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프로 무대 경쟁은 더 살벌하고, 훨씬 잔인하다. 김현수(LG), 서건창(KIA)처럼 지명을 못 받고 신고 선수로 입단한 이가 프로에 한 획을 그은 예도 있다. 중고교 시절의 야구는 그저 프로로 오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현재,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은 프로 입단 순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 정도다. 110명의 예비 신인 선수에게 응원을 보낸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whizzer4@hani.co.kr
*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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