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 좋은 매니저? 월급이나 매니 줘요! [말록 홈즈]
[말록 홈즈 43화]
가장 포근한 휴가는 남들 일할 때 나만 쉬는 휴가 같습니다. 꿀처럼 달콤했던 어느 아침, 느지막이 밥상 앞에 앉아 TV를 켰는데, 드라마 ‘미생’이 나옵니다.
원 인터내셔널 영업 3팀이 내부 부조리를 해결하자, 사장이 찾아옵니다. 오상식 과장에게 과장 몇 년째냐고 묻습니다. 7년차라는 대답에 사장이 말합니다.
“많이 늦었군.”
회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과장 재급 기간은 4~5년입니다. 친구들 중 가장 빨리 과장으로 진급했던 친구 A가 떠오릅니다. 활기차고 적극적인 성격에 아이디어와 추진력도 특별했습니다. 우리 친구들 중 별(임원)이 나오면 A가 최초일 거라는 데, 아무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연말, A의 차장 진급을 예상한 친구들은 미리 축하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축하잔치는 위로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고과 폭탄을 맞아, 얼음물을 들이켰답니다. ‘태도’가 원인이었다더군요. 복지부동 성향이 강했던 인사권자는, 그 친구의 능력과 자신감을 부담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일은 잘했는데, 상급자에 대한 예의가 결여됐다더라. 그래서 자숙의 기회를 주셨대. 특별히 배려해서.”
“야, 너 올해 초에 너네 보스 관련 업무 맡아서 엄청 바빴잖아? 성과도 어마어마했고.”
“푸핫, 그랬지. 그 건으로 우리 팀 올해 연간 성과경연대회에서 특별상도 받았어. 난 그 일 맡아서, 너무 자기 주관대로 밀어붙이려고 한다고 찍혀서 최하 평점 받았고.”
누구 하나 잔을 내밀지 않았는데, 모두 순식간에 술잔을 들이켰습니다.
A의 과장기간은 10년이었습니다. 미생 오상식 과장의 7년에 고등학교 재학기간 3년을 더한 기간입니다. 고과로 진급이 한번 밀리면,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듬해부터 점수 좋은 후배들과 경쟁하면서 자연스럽게 도태됩니다. A는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본명이 ‘과장’인 듯 느껴지기 시작했답니다. 10년차에 접어들 때는 해탈한 듯 보였습니다. 조심스레 진급 여부를 묻는 친구들에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앞으로 9,990년만 더하면, 레알 만년과장이다.”
도인이 돼버렸습니다.
그해 말 A는 길고 긴 과장을 졸업했고, 친구들은 값진 졸업식을 열어 주었습니다. 가장 빨리 과장으로 승진한 친구가 가장 늦게 차장이 되었고, 우리는 어느덧 중년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믿습니다. A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겁니다. 성공하면 요트 한 대 사주겠다고 하길래, 그냥 지금 5만원만 달라고 했더니 카톡에 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또 소중한 벗을 하나 더 잃었습니다.
과장(課長: 부서 과, 우두머리 장)은 본래 ‘부서의 수장(head of section)’를 의미했습니다. 90년대에 팀제가 보편화되며, 이후에는 직책과 무관한 직급이 되었습니다. 부장(部長: 부서 부, 우두머리 장)은 여러 개의 과를 총괄하는 ‘부문장(head of department)’이었습니다. 차장(次長: 버금 차, 우두머리 장)은 ‘차석 리더, 팀리더에 버금가는 직원(deputy head of department)’을 뜻했습니다. 과장과 마찬가지로 직급의 의미로 고착됐습니다. 독특하게도 검찰에선 부장보다 차장이 높습니다. 지방검찰청에서 검사장 다음이니, 본래 의미에 충실한 직급명입니다. 과장의 영어단어는 manager입니다. 이태리어 매니쟈레(maneggiare)에서 왔습니다. ‘반죽하다’, ‘처리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말(horse)을 잘 다루는 사람’을 의미했다네요. 과거엔 말의 중요성이 지금보다 아주 컸겠죠. Maneggiare는 손을 가리키는 라틴어 manus가 변형된 말입니다. 일솜씨를 의미하는 한자어 ‘수완(手腕)’에도 손이 들어가는군요. 말 그대로 매니저는,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업무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유능한 관리자를 뜻합니다.
이전 회사에 다닐 때, 임원과 팀장을 제외한 전 직원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인의식과 권한,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한 변화였답니다. 하지만 입사 2개월차 신입사원이나 20년차 부장을 죄다 매니저라고 부른다고, 키우지 못한 능력이나 받지 않은 권한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병장이랑 이등병을 모두 병장이라고 부르면, 이등병이 듬직해 보이는 게 아니라 병장이 우스워 보입니다. 실제로 매니저 직급제를 시행해 보니, 부작용과 볼멘소리가 창궐했습니다. 이름 변화만으로는 없던 능력이 생기지 않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호칭 때문인지 선후배 사이의 존중은 짜증으로 퇴색돼버렸습니다. 게다가 외부 고객사 미팅에서 누가 위 아래인지 혼동을 초래하는 코미디가 이어지며, 그 회사의 직원 호칭은 예전의 사원-대리-과장-부장으로 요요됐습니다. 격동의 매니저 도입 초창기에, 사내 게시판에 익명으로 냉소적인 댓글이 올라왔었습니다.
“월급이나 ‘매니 줘’요.”
사장 친위대 직원들이 작성자가 누군지 찾아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이직한 건 아닙니다. 진짜라니까요!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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