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이기자-36] 서울 아파트 공급 늘리기 위해 정부, ‘재건축·재개발 촉진법’ 제정 정비사업 절차 확 줄여준다는데 야당 협조 없이는 통과 쉽지 않아
서울 집값이 6개월 연속 오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울에 살고 싶어 하지만 대규모 아파트를 지을 땅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정부는 이에 재건축·재개발 활성화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낡은 주택을 허물고 새로 짓는 과정에서 물량을 늘리는 게 최선이란 판단입니다.
정비사업이 잘 되도록 기존 법을 고치는 건 물론, 아예 새로운 법까지 만들겠다고 합니다. 이른바 ‘재건축·재개발 촉진법(가칭)’입니다. 규제가 아닌 지원을 하는 게 핵심입니다. 8.8 대책을 통해 도입을 공식화 했던 정부가 한 달 만인 지난 3일 법 초안을 내놨습니다.
7→5단계로 줄여...사업기간 3년 단축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지원한다는 걸까요. 먼저 길고 복잡한 재건축·재개발 절차를 줄여주겠다고 합니다. 현재 절차는 크게 7단계로 돼 있습니다. ‘기본계획→정비계획→조합설립→사업시행계획→관리처분계획→이주·착공→준공’입니다. (각 단계에 대한 설명은 부동산 이기자 2화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촉진법에는 7단계 절차를 5단계로 줄이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초기 단계인 기본계획과 정비계획, 중·후반 단계인 사업시행계획과 관리처분계획을 동시에 세울 수 있게 한 겁니다. 지방자치단체가 계획을 일괄 처리하는 것도 허용했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이로써 재건축·재개발 사업 일정이 3년 정도 앞당겨질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사업 속도를 높이는 데 필요한 정보도 제공합니다. 조합을 만들기 위해선 아파트 소유주들로부터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진 조합설립 추진위원회가 아파트 등기를 직접 하나하나 떼서 소유주를 파악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촉진법에는 지자체가 추진위에게 아파트 소유주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훨씬 쉽게 소유주를 찾을 수 있는 겁니다.
3년간 한시적 용적률 혜택...사업성↑
촉진법에는 사업성을 높여주는 방안도 담겼습니다. 공사비 급등으로 재건축·재개발 사업성이 뚝 떨어진 상황이거든요. 비록 3년간 한시적으로 시행한다는 조건이 있긴 합니다. 그래도 정비사업 최대 용적률을 지금보다 30%포인트 더 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용적률이 높아진다는 건 쉽게 말해 팔 수 있는 집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용적률은 땅 위 공간을 얼마나 쓰느냐 하는 ‘밀도’를 나타내니까요.
보통 아파트의 땅 용도가 제3종 일반주거지역(제3종)이니 이를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촉진법이 시행된다면 제3종에 있는 역세권 재건축 현장은 최대 용적률이 360%가 아닌 390%로 늘어납니다. 역세권이 아닌 일반 정비사업장은 300%가 아닌 330%까지 용적률을 허용합니다.
다만 서울 강남3구와 용산구 등 투기과열지구에 속한 재건축·재개발 현장에는 용적률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분양가가 높아 상대적으로 사업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8.8대책 발표일 전에 사업시행계획인가를 신청한 사업장도 적용 대상이 아닙니다. 용적률 혜택을 노려 사업을 되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공사비 분쟁 생기면...전문가 파견
조합원들 간에 갈등이 생기면 사업이 오래 표류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를 막기 위한 방안도 포함됐습니다. 조합임원을 자르는 해임 총회를 연다면 이를 관할 지자체에 신고하도록 한 겁니다. 조합임원이 해임되면 지자체는 ‘전문조합관리인’을 뽑아 사업이 빨리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합니다. 전문조합관리인은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가가 조합임원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최근 공사비를 놓고 건설사와 조합 간 갈등도 심한 상황이죠. 이에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에서 공사비 분쟁이 생기면 전문가로 구성된 분쟁조정단을 파견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조합의 전문성을 보완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 등이 업무를 지원할 수 있는 공공관리인 제도도 새롭게 규정됐습니다.
조합설립 동의율 75%→70% 완화
촉진법을 새로 만드는 것뿐만 아닙니다. 재건축·재개발과 관련된 기존 법인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도 바꾸고 나섭니다. 우선 재건축 조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주민 동의 요건을 풀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조합을 설립하려면 전체 아파트 소유주 가운데 75%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촉진법은 동의 요건을 70%로 낮췄습니다. 만약 100가구 규모 단지라면 현재 75가구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앞으론 70가구만 동의하면 재건축 조합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동별 동의 요건도 2분의 1 이상에서 3분의 1 이상으로 낮췄습니다. 만약 아파트가 3개동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봅시다. 이 중 2개동에서 100% 동의를 받아도 1개동 주민 절반 이상이 동의하지 않으면 지금껏 재건축 조합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촉진법이 시행되면 이젠 동별 동의율이 33%만 넘으면 됩니다. 참고로 상가도 한 동으로 보는데요. 상가 동의 요건이 완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기신도시도 적용...올림픽3대장 주목
촉진법 제정안과 도정법 개정안은 1기 신도시 등 노후계획도시를 정비할 때도 적용된다고 합니다. 결국 재건축 선도지구를 뽑는 경쟁이 한창인 1기 신도시(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가 수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재건축·재개발 초·중반 단계에 있는 조합들이 수혜를 볼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기본계획과 정비계획을 한 번에 세울 수 있고, 조합 설립 요건이 완화된 건 아무래도 안전진단을 이제 막 통과한 단지들에게 더 유리하다”며 “가령 서울 송파구에 있는 이른바 ‘올림픽 3대장’ 아파트들이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맞춰 지어진 올림픽선수기자촌·올림픽훼밀리타운·아시아선수촌 아파트를 통상 올림픽 3대장이라 합니다.
1980~1990년대 대단지 아파트가 많이 지어진 택지개발지구도 상당수가 아직 재건축 초기 단계입니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 양천구 목동, 노원구 상계동, 도봉구 창동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사업성을 높여주는 대목은 노원과 도봉에 있는 노후 단지들에겐 상당한 희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중고층인데다 소형 평수가 많은 단지가 꽤 있어 그간 사업성이 떨어진단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야당 동의 반드시 필요...실현 가능성은 ‘글쎄’
하지만 과연 정책이 실현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습니다. 현재 국회가 일명 ‘여소야대’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여당이 적고 야당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190석 가량 되는 범야권의 동의 없이는 위에 설명한 어떤 정책도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저 하고 싶은 위시 리스트를 모아놓은 것에 그칠 뿐입니다.
당장 정부가 올해 1월 내놓은 정책 과제인 재건축 안전진단 시기 조정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도정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어서죠. 때문에 일각에선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정책을 자꾸 내놔 현장의 혼란만 일으킨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야당과 어느 정도 논의를 하고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위주로 발표해야 하는 건 아니냐는 취지죠. 가령 정부가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재초환)를 폐지하겠다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작년에 이미 관련 제도를 한차례 완화한 만큼 야당 입장에선 빨리 통과시켜야 하는 우선순위 법안이 아닐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계속 폐지하겠다고 하니 재초환이 부과된 단지들을 위주로 서류 제출을 거부하는 등 강한 반발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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