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밥상 - 성산 앞바다를 병풍처럼 두른 환대의 학교 [전국 인사이드]
“명절날 큰집에 온 거 같아요.”
8월31일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마을 안에 희한한 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신술목학교. 신이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뜻을 가진 이 명칭은 신산리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이날 학교 개교를 축하하고 고사를 지내기 위해 60여 명이 ‘학교’를 가득 채웠다. 성산 앞바다를 병풍처럼 두르고 사과와 배, 귤, 시루떡, 초, 뜨개 북어, 명주 실타래, 수제 막걸리 등을 올린 고사상이 차려졌다. 손님들은 돌아가며 절을 한 뒤 저마다 학교에 대한 바람과 번영을 기원하는 말을 고했다.
고사를 지낸 뒤 집안 곳곳에 상이 깔리고 비건식으로 조리한 잡채, 감태주먹밥, 미역초무침, 열무김치, 배추김치 등과 수육, 새우브로콜리볶음, 고사 음식 등이 올랐다. 삼삼오오 밥상 주변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웃고 떠드니 영락없는 명절 풍경이다.
사랑이 피어나는 곳, 같이 사는 곳, 마음을 환기하는 곳, 부동산·결혼·주식 이야기를 하지 않는 곳, 삶을 나누는 곳, 편안한 곳, 눈만 뜨면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곳, 행복해지는 곳, 제주를 알아가는 곳, 살다 보면 살아지는 곳. 이 공간을 설명해달라고 물으니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신술목학교의 ‘교과 과정’은 제주 이주 여성청년 8명이 ‘환대로운 삶을 연습하는 두 달 함께-살기’다.
학교 운영자는 ‘환대’라는 키워드로 만난 수플(활동명)과 고은영씨다. 지역사회에 연고가 없는, 게다가 여성인, 게다가 돈 없는 청년들이, 관광객이 아닌 이주민으로서 ‘환대받을 자리’를 제주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받기도 어려운 환대를 어떻게 연습한다는 걸까? 이주 11년 차인 고은영씨는 자신의 ‘환대받지 못했던 경험’과 ‘환대받았던 경험’이 이 학교를 상상하게 했다고 말한다. “환대는 결국 마음이에요. 진짜 괜찮다고 얘기하는 그 마음.”
몇 해 전, 그는 애를 쓰며 쌓아 올렸던 일들이 부서지자 오랜 기간 누워서만 지냈다. 자신이 더 이상 환대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를 에워쌌고 문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그때의 그를 삶으로 끌어내준 것은 “진짜 괜찮아”라는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고씨에게 지금의 자리를 내주었다. 환대는 그런 힘을 가졌다.
그는 “제주도 역시 이상한 20년을 보내고 있지 않나. 특별법(제주특별법)이 생기고 부동산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뛰고 엉망진창이다. 사람들의 불안도 크고 더군다나 청년들의 정서도 날뛰게 됐다”라며 “그런데 제주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터전에서 불안을 경험하고 이곳으로 온다. 이 양쪽을 연결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내 삶이지만 내 자리가 없고,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불안을 견디지 못해 제주를 찾아온 청년들에게 안전한 정착을 도와주는 것. 신술목학교의 ‘교과 목표’다. 이를 위해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텃밭을 가꾸고, 밥을 지어 먹고, 마을 산책을 하고, 저녁 시간에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함께-살기’ 과정 막바지엔 마을 축제를 기획할 예정이다.
이 학교의 장래희망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신술목학교는 참가자들이 제주를 알아가고 서로를 알아가는 무해한 경험을 쌓게 한다. 운영진은 이 경험이 참가자들이 앞으로 겪을 고생에서 힘이 되어주리라 믿고 있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 제주 어딘가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도 힘들 때 전화해 ‘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괜찮아”라는 위로와 안부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을 이곳에서 만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농개(신산리 용천수)에서 수영을 하는데 그때 알게 됐어요. ‘아, 이걸 하기 위해 왔구나!’”
수플의 말에 이 학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사라졌다. 땀이 주르륵 흐르는 더운 여름날 차가운 용천수에 풍덩 뛰어드는 즐거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내 직업이, 통장 잔액이, 학력이, 성별이, 출신 지역이 어떻든 상관없다. 신술목학교는 그런 모두가 환대받는 곳이다.
조수진(<제주투데이> 기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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