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전업계 양대 산맥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500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글로벌 냉난방공조(HVAC) 시장을 미래 먹거리로 낙점하고 ‘에너지 패권 전쟁’에 도전장을 던졌다. 세계적인 탄소중립 규제와 AI(인공지능) 시대 본격화로 공조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가정을 넘어 빌딩이나 공장, 데이터센터 등을 아우르는 B2B 시장 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2030년 500兆, AI가 바꾼 공조 지형도
25일 KB증권에 따르면 글로벌 HVAC 시장 규모는 2030년 50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설립으로 에너지 효율을 위한 냉각 시스템 중요성이 커지는 추세”라며 “중장기적으로 볼 때 AI 시대 승자는 전력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냉각 시스템 사업을 영위하는 공조 기업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HVAC은 얼마 전까지 ‘성숙 산업’으로 분류됐다. 성숙 산업이란 제품 개발·혁신이 활발한 성장기와 달리 추가 성장이 제한적일 수 있는 산업을 말한다. 산업이 무르익어 더 이상 확장되기보다 안정·효율·표준화 중심으로 운영되는 상태다.
그러나 전 지구적 기후 위기와 AI 혁명이 맞물리며 HVAC는 에너지 솔루션 핵심이자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으로 재정의됐다. 특히 생성형 AI 확산으로 세계 곳곳에 초거대 데이터센터가 우후죽순 세워지면서 서버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열기를 식히는 냉각 기술이 센터 운영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가 됐다.
기존 주력 냉각 방식이던 공기 순환 방식(공랭식)으로는 급격하게 높아진 열기를 감당하기 어렵다. 덕분에 냉각수를 직접 순환시키는 액체 냉각 기술이 각광을 받았다. 업계에서는 AI 데이터센터 운영비의 40% 이상이 냉각 시스템에 쓰이는 만큼 에너지 효율을 높이면서도 비용을 낮출 수 있는 기업이 글로벌 HVAC 시장의 패권을 차지할 것으로 본다.

‘지배자’ 다이킨·캐리어 vs ‘추격자’ 삼성·LG
글로벌 HVAC 시장의 현재 지배자는 일본 다이킨공업과 미국 캐리어, 트레인 등이다. 이들 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25~30% 수준이다. 진입장벽이 매우 높아 한동안 ‘그들만의 리그’로 불렸다.
가정부터 상업용까지 탄탄한 라인업을 갖춘 다이킨과 1902년 현대적 에어컨을 개발한 윌리스 캐리어가 설립한 캐리어, 고효율 대형 공조기(칠러) 분야 절대 강자 트레인 등은 수십 년간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며 견고한 성벽을 쌓았다.
하지만 최근 이 같은 지배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돈다. 추격자인 삼성·LG전자가 가전 분야에서 쌓아온 노하우와 경험, 혁신 DNA 등으로 시장 판도를 뒤흔들기 위한 채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전통 강자들의 강점은 금속 가공과 냉매 순환 등 기계 공학 노하우다. 반면 삼성·LG전자가 가진 무기는 반도체 기반의 초정밀 제어 기술과 AI·소프트웨어 등이다. 과거 냉난방공조 시스템은 설정 온도를 맞추기 위해 콤프레셔를 켜고 끄는 방식이었다면 삼성·LG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수인 초정밀 온도 관리 기술을 HVAC에 이식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LG전자의 인버터 기술은 모터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해 에너지 소비량을 최대 30~50%까지 절감할 수 있다”며 “에너지 효율 상승과 비용 절감이 생존과 직결된 AI 데이터센터에 있어 국내 기업의 기술력과 제품은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선택지”라고 말했다.

AI로 호흡하는 데이터센터 HVAC
다이킨·캐리어 등이 공조 기기 내구성과 출력 효율에 집중할 때 한국 가전 거인들은 데이터센터를 관리하는 플랫폼에 주목했다.
삼성전자 스마트싱스·LG전자 씽큐로 대표되는 연결성 플랫폼은 데이터센터에 있는 수만 개 센서와 공조기를 하나로 연결해 AI를 통해 전력을 실시간으로 최적화한다. AI가 데이터센터 작업량 변화를 감지해 최적의 타이밍에 냉각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불필요한 전력 낭비를 막아 운영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또 AI 데이터센터 내 특정 지점에 열이 몰리는 것을 AI가 파악해 주변 공조기의 풍량과 각도를 조정할 수 있고 안정적인 온도 유지가 가능하다.
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삼성전자 공조 솔루션 사업은 지난 5년간 평균 두 자릿수 이상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LG전자도 마이크로소프트(MS) 등과 냉각 솔루션 협력을 체결하며 같은 기간 15% 수준의 성장률을 나타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다이킨이나 캐리어 등의 하드웨어 내구성은 우수하지만 수만 개 기기를 AI로 연결해 전력 소모를 최적화하는 소프트웨어 역량은 삼성·LG전자가 한발 앞서 있다”며 “데이터센터 운영사 입장에서는 단순한 냉각기가 아니라 탄소 배출권 관리까지 가능한 지능형 에너지 관제탑을 도입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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