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진명
사진 김윤경
취재 협조 홍콩관광청
일상으로 불러온 아시아의 예술
엠플러스(M+)

홍콩섬에 어둠이 내리면, 빅토리아 하버(Victoria Harbour) 너머 구룡반도의 야경이 바라보인다. 별처럼 반짝이는 마천루 틈에서 유독 두 눈을 사로잡는 파사드 속 글자 ‘M+’도. 팬데믹 때문에 한동안 빗장을 걸었던 홍콩은 고립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아시아 최초의 글로벌 컨템퍼러리 컬처 뮤지엄 엠플러스다. ‘미술관 그 이상(more than a museum)’이라는 뜻을 담은 엠플러스는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11월 서구룡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 약 40헥타르 부지에 미술관, 박물관, 극장, 식당 등의 문화 시설을 세워 아시아의 문화 허브로 발전시키자는 홍콩 정부 주도의 프로젝트다. 1998년 논의를 시작해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착공을 기준으로 약 5년간의 긴 공사 끝에 완공된 이곳은 건축, 디자인, 영상, 현대 미술 등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떠다니는 박물관’을 콘셉트로 공간을 설계했다는 스위스 건축회사 헤어초크&드뫼롱(Herzog & de Meuron)의 설명처럼 엠플러스는 홍콩의 도시 경관과 상호작용하는 건물의 미니멀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지하 7층과 지상 10층으로 이뤄진 건물은 거꾸로 놓인 T자 모양이며, 지하는 수장고를 포함한 대규모 전시 공간을 이루고 있다. 지하 2층의 파운드 스페이스(Found Space)에서 만난 엠플러스 마케팅 담당자가 “이 건물 아래에는 공항 철도가 지나는 터널이 있어요.”라고 귀띔한다. 즉, 파운드 스페이스는 터널의 윤곽을 따라 완성된 전시장인 것. 한국을 대표하는 설치 예술가 양혜규의 〈소리 나는 구명 동아줄(Sonic Rescue Ropes)〉이 1층 로비 천장부터 지하 2층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길게 드리워 있다. 설치 미술과 몰입형 전시가 펼쳐지는 이 공간에서는 무료로 전시 관람이 가능하다. 건물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통해 언제든 예술과 우연히 만날 수 있도록 모두에게 개방됐다.

비디오 아트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1층을 지나 33개의 갤러리로 구성된 2층에 도착하자, 한 오페라 가수가 복도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선물할 관객을 찾고 있다. 마케팅 담당자가 갑자기 마주친 의외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이 퍼포먼스 역시 설치 예술이에요. 대만 출신의 시각 예술가 리밍웨이(Lee Mingwei)의 〈소닉 블로섬(Sonic Blossom, 9명의 오페라 가수가 미술관 관람객에게 다가가 노래를 선물하는 라이브 퍼포먼스. 2024년 8월 27일부터 9월 29일까지 열렸다.)〉이죠.” 이처럼 엠플러스는 동시대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현대 예술가와 건축가, 디자이너를 한자리에 불러 모아 홍콩 문화의 미래를 다채롭게 열어가는 중이다.
600여 년의 중국 문화와 홍콩의 역동성이 만나면
홍콩 고궁 박물관
Hong Kong Palace Museum


2022년 홍콩은 새로운 랜드마크와 함께 여행자를 맞이했다. 중국 베이징 고궁 박물관의 소장품과 문화재 일부를 전시하는 홍콩 고궁 박물관의 등장은 서구룡 문화지구의 완성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고개를 뒤로 잔뜩 젖혀 본다. 비밀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자금성의 아름다움을 세련되고 현대적 미학으로 재해석했다는 외관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1만 3,000제곱미터 면적의 거대한 건축 규모는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위용을 이곳 서구룡 반도까지 충분히 전해준다. 내부에도 자금성의 정체성이 이어진다.

자금성의 황금 기와를 모티프로 한 메탈 소재의 기왓장이 천장에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고궁 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3개의 아트리움이 여러 층을 수직으로 연결한다는 것. 개방된 천장에 다다를수록 기왓장이 반투명해지는데, 중국의 대나무와 실크 커튼을 연상시킨다. 전통 문화와 현대적 미학이 균형을 이루는 건물은 박물관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홍콩이란 도시와 제법 닮은 듯하기도 하고.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1~3층에는 자금성 황실 보물, 고대 중국 도자기, 중국 회화와 서예, 불교 유물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소장품 상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4층에서는 유료로 진행하는 특별 전시가 열린다.
지속 가능한 삶의 현장
센트럴 마켓
Central Market


홍콩섬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 Escalator)는 총 800미터 길이로, 센트럴에서 중상부 주택가로 이어진다. 미드레벨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편리한 이동을 위해 고안된 하나의 교통수단인 셈.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는 하행선을, 10시 20분부터 자정까지는 상행선을 운행하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이동에 약 20분이 걸린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보여진 것처럼 홍콩다운 장면과 이국적인 풍경을 구석구석 고루 훑고 지나가는 덕분에 여행자가 놓쳐선 안 되는 홍콩의 명소 중 하나다.

센트럴 마켓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의 시작점에 자리해 있다. 바우하우스(Bauhaus) 스타일로 지은 4층짜리 건물에 1939년 문을 열었다. 19세기 서양인이 모여 살던 동네(오늘날엔 란콰이퐁 Lan Kwai Fong 이라 불린다.)와 언덕 위쪽 원주민 거주 지역 사이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장이 되어줬다. 인근 주거 지역이 상업 지구로 바뀌며 원래의 기능을 잃고 2003년 문을 닫았다가 2021년에 리모델링과 리브랜딩을 통해 다시금 주민의 지속 가능한 삶의 현장으로 거듭났다. 커뮤니티 공간이자 라이프스타일 허브로 재탄생한 것이다.

깔끔한 선과 미니멀한 장식이 특징인 건물 외관은 원래의 모습과 최대한 가깝게 보수했다. 내부 역시 일부 간판과 가판대, 넓은 중앙 계단 등에서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생선 가게, 한약방, 정육점의 가판대 위에는 홍콩을 알리는 로컬 브랜드의 상품이 가득하고, 로컬 제로 웨이스트 숍부터 글로벌 브랜드, 식당과 카페까지 수많은 상점이 입점해 있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캠페인과 브랜드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자체 운영하는 헤리티지 투어에 참석하면 가이드와 함께 건물 곳곳의 과거와 현재를 세세히 돌아볼 수 있다.
홍콩의 고아한 면모
FWD 하우스 1881(FWD House 1881)

럭셔리와 투박함이 마구 뒤섞인 도시. 이 문장을 읽고 홍콩이 떠오른다면 아마도 그건 침사추이(Tsim Sha Tsui)를 경험한 이후일 테다. 호화로움을 자랑하는 페닌슐라 홍콩 (Peninsula Hong Kong)과 그 뒤편에 자리한 알싸한 청춘의 아지트, 혹은 도시 속 게토(Ghetto)로 불리는 청킹맨션(Chungking Mansions, 저가형 게스트하우스, 다문화 레스토랑 등이 밀집한 건물의 이름으로, 영화 〈중경삼림〉의 촬영지로 유명하다.)이 한 동네에 얽힌 정경을 봤더라면 더더욱. 사실 침사추이를 비롯한 홍콩 대부분의 동네가 그렇다. 거리에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곳은 명품 쇼핑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거두면 서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동네가 되곤 한다. 이처럼 홍콩 도시 곳곳은 어느 하나 소외시키지 않고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포용력이 넘친다.

침사추이에서 놓쳐선 안 되는 화려한 문화 유산은 바로 FWD 하우스 1881이다. 해군 경찰 총독부로 사용하던 건물을 그대로 보존해 부티크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 쇼핑 단지로 탈바꿈한 곳이다. 제2차 아편전쟁(1860)에서 승리한 영국은 구룡반도를 영토로 편입한 후,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침사추이에 1884년 해군 경찰 총독부를 세웠다. 격변의 시대가 지나고 해군 경찰 총독부는 안보와 시설 노후를 이유로 1996년 홍콩섬의 사이완호(Sai Wan Ho)로 이전했는데, 홍콩 정부는 옛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유적지 재생 작업을 거친 후 2019년 홍콩의 보험회사 FWD 그룹이 건물을 대여해 역사를 품은 호텔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
건물 중정에 들어서자 대도시의 번잡함이 차단되고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아치형 기둥, 흰색 석고로 이뤄진 벽, 장식용 난간 등 빅토리아 신고전주의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이 중앙 정원을 감싼다. 총기를 반납하던 무기고와 비둘기가 서신을 전달하던 우체통 같은 옛 시설이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시 고위층의 사무실을 개조한 10개의 객실은 현재 숙박객을 받지 않지만, 웨딩 촬영이나 결혼식 등의 행사를 위한 대관은 가능하다고. 대신 그 아쉬움을 프렌치 레스토랑, 중식당, 일식당, 스테이크 전문점과 1개의 바가 자리한 다이닝 공간에서 달래보자. 그중 마굿간 자리에 들어선 스시 전문점 ‘우다츠 스시(Udatsu Sushi)’나 당시 유치장을 개조한 바 ‘더 셀(The Cell)’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더욱 생생한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예술인을 위한 보금자리
아코 북스
ACO BOOKS

홍콩의 높은 빌딩 숲을 거니는 동안 자주 드는 생각 하나. 건물의 윗층에서는 과연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여행자가 드나드는 대부분의 상업 시설은 저층에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래된 건물 14층에 자리한 예술 독립서점 아코 북스가 모든 것을 대변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약간의 궁금증은 해소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픽 디자인과 광동어를 입힌 스티커, 전시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가장 꼭대기 층으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안 풍경만으로도 이 건물에 분명 예술 서점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Art and Culture Outreach’의 약자인 아코 북스는 주로 인문·예술 서적을 큐레이팅하고 홍콩과 아시아권 아티스트의 그림, 포스터, 공예 등을 소개하는 출판사이자 독립 서점이다. 더 나아가 동명의 비영리단체가 서점이 들어선 푸탁(Foo Tak) 빌딩 전체를 예술인의 허브로 활용하고 있다. 신진 아티스트 발굴하고 지원하는 아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예술가에게 도움을 주는데, 전시 비용을 지원하거나 작업실을 저렴하게 임대해준다. 후자의 경우 자립 능력이 생긴 입주 작가는 다른 예술가를 위해 공간을 비워야 한다.

2008년 아코 북스가 문을 연 이래 건물 전체가 예술과 문화를 위한 공간으로 차츰차츰 변신했다. 그 결과 계단이나 복도의 빈 벽에서도 전시가 열리는 아트 센터로 거듭난 것. 지난 20여 년 동안 수많은 아티스트가 거쳐간 이곳에는 층마다 아트 갤러리와 아티스트 레지던시 등이 자리해 있다. 비정기적으로 작가와 함께하는 워크숍도 진행하니 방문 전 일정을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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