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풍경] 바람은 이미 가을… 미리 걸어 본 3.2㎞ 단풍나무숲길
“천안 삼거리 흥! 능소나 버들은 흥!”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충남 천안은 흥에 빠졌다. 54개국에서 온 4,000여 춤꾼의 흥겨운 노랫소리, 춤사위로 시내가 들썩였다. 천안흥타령축제의 모티브가 된 흥타령은 능소라는 처녀와 장원급제한 전라도 고부 선비 박현수가 천안 삼거리에서 얼싸안고 춤을 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충청, 전라, 경상도로 길이 갈라지고 합쳐지는 천안은 흥타령 하나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지만, 막상 여행지를 꼽으라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전 국민이 한 번은 가봤을(가봐야 할) 명소가 있으니 독립기념관이다.
독립기념관 한 바퀴 단풍나무숲길
1987년 개관한 독립기념관엔 소풍 나온 유치원 꼬마부터 관광버스를 대절한 노인까지 평일에도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선열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야 한다는 당위에 좌우 갈등이 끼어들 틈은 없다.
주차장에서 본관(겨레의집)까지는 약 700m 일직선 대로로 연결된다. 겨레의탑, 겨레의집 뒤로 흑성산 능선이 우람하고도 부드럽다. 높이 51m 겨레의탑은 불멸의 민족기상을 표현했다. 비상하는 날개 같고, 두 손 모아 평화를 기도하는 듯도 하다. 겨레의 뿌리, 시련, 함성 등의 주제로 구성된 6개 전시관은 대충만 둘러봐도 2시간 이상 걸린다. 여기에 전시관 주변 독립운동가 어록 시비, 통일염원의 동산까지 꼼꼼히 보려면 하루로도 모자란다.
재차 삼차 방문으로 전시관을 충분히 관람했다면, 겨레의집을 바깥으로 크게 두르는 단풍나무숲길을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 개설한 도로 양쪽에 1,200여 그루 단풍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1997년에 완공했으니 햇수로 27년, 울창한 청년 숲으로 성장해 가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겨레의탑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내려서면 단풍나무숲길이 시작된다. 전체 3.2㎞, 주차장까지 오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넉넉하게 1시간 30분을 잡는다. 절반은 완만한 오르막, 나머지 절반은 내리막이다. 숲길로 접어들면 곧장 어둑어둑한 그늘이다. 한 달 후면 절정의 색감을 뽐낼 테지만, 햇살 머금은 초록별의 흔들림도 눈부시다. 바람은 이미 가을이다.
전 구간 포장이 잘돼 있어 걷기에 불편함이 없다. 이마에 살짝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경사가 있지만 유아차를 밀고 걸어도 될 정도다. 나뭇잎 사이로 살짝 열린 하늘에 흑성산 정상이 보인다. 방송사 송신탑과 전망대같이 생긴 망루가 세워져 있다. 오르막길이 끝나는 부분에 산 정상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약 1㎞ 거리지만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길이다.
일반 등산로는 인근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 외곽에서 연결된다. 약 3.5㎞, 오르는 데만 1시간 30분가량 걸린다. 시멘트포장 길이라 평일에는 조심스럽게 정상까지 차로 갈 수 있지만, 경사가 심하고 교행이 불가능해 휴일과 주말에는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흑성산(519m)은 본래 검은성(儉銀城)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발음만 차용해 흑성산으로 변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암행어사 박문수 일화가 독립기념관 건립과 관련해 회자되고 있다. 조선 영조 때 박문수가 죽자 묘소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했는데, 유명 지관이 200~300년 후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니 다른 곳에 쓰라고 권했다 한다. 박문수의 묘는 현재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6㎞ 떨어진 은석산 정상 부근에 있다.
흑성산 정상에는 일부 남은 산성의 흔적을 복원해 놓았는데, 성문이며 성벽이 가지런한 흙벽돌이어서 옛 성의 정취를 느끼기는 어렵다. 대신 전망은 시원해 서쪽으로 천안 시내가 손에 잡힐 듯하고, 동남쪽으로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열사의 고향 아우내(병천)로 이어지는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단풍나무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난데없이 버려진 선로와 기차가 보인다. 2000년에 조성한 밀레니엄숲 조경의 일부다. 조국 통일과 국민 화합을 바라는 의미에서 한반도 모형으로 꾸몄다고 하는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다.
아래는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이다. 광화문을 차지하고 있던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 조선총독부 건물은 광복 50주년인 1995년 철거돼 이곳으로 옮겨졌다. 거대한 돌기둥이며 첨탑이 폐허에 버려진 것처럼 흩어져 있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한 모양새다.
왕건의 전설 태조산, 호두의 원조 광덕사
흑성산 줄기는 북측 태조산으로 연결된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이 산에 진을 치고 견훤의 군사를 무찔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주변에는 왕건이 머물렀다는 유왕골,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유량동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태조산은 해발 420m로 낮은 산이지만 천안 시민으로부터 사랑받는 휴식처다. 서쪽 사면에 태조산공원이 조성돼 있다. 주차장에서 산림레포츠단지까지 약 1㎞ 구간에 무장애 덱을 포함한 숲길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울창한 수목 사이로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산림레포츠단지에는 나무와 나무를 연결한 숲 모험 시설이 설치돼 있다. 그중에서도 집코스터가 인기다. 집라인과 롤러코스터의 스릴을 결합한 놀이기구로, 길이 510m 철봉에 매달려 곡선으로 활강한다. 집라인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커브를 돌 때마다 몸이 휘청거려 짜릿함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숲나들e’ 온라인 예약이나 당일 현장 구입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인근에 청동대불로 이름이 알려진 각원사가 있다. 전각보다 불상이 먼저 세워진 특이한 이력을 지닌 절이다. 높이 15m, 무게 60톤의 청동대불은 1977년 재일동포 김영조씨의 시주로 사찰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졌다. 이후 설법전, 칠성전, 관음전 등이 들어섰고 대웅보전은 1996년에야 완공됐다. 현대식 사찰답게 마당도 널찍하고 건물 하나하나가 웅장하다. 특히 대웅보전은 34개 주춧돌과 100여 만 개 목재가 투입된 국내에서 가장 큰 법당이라 자랑한다.
각원사가 신생 사찰이라면 광덕산 자락 광덕사는 천안에서 가장 오래되고 상징적인 절이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누문 앞에 세 줄기로 굵직하게 뻗은 호두나무가 눈길을 잡는다. 수령 400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바로 앞에 ‘유청신 선생 호도나무 시식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려 충렬왕 16년(1290) 이곳 출신 역관 유청신이 원나라에서 어린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나무는 광덕사에 심고 열매는 집 뜰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나무는 그 후계목으로 보고 있다.
천안호두과자가 명물이 된 것도 알고 보면 이 나무 덕이다. 호두나무는 잎도 꽃도 크게 눈길을 끌지 못한다. 자세히 보면 광덕사로 가는 도로 양편에도 호두나무가 가로수로 심겨 있다. 잎은 그대로지만 수확은 이미 끝난 상황이다. 4일부터 6일까지 사찰 인근 광덕영농조합(광덕쉼터)에서 호두축제가 예정돼 있다.
천안=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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