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만 생각하는 '사이비 대통령, '뉴라이트 시즌2' 아닌 '사이비 시즌2'
역사학자 김기협 씨가 쓴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이 다시 출판된다. 2008년 <프레시안>에서 연재했던 것을 묶어 같은 해 낸 이 책은 이명박 정권의 이데올로기 집단 노릇을 하는 뉴라이트의 활동과 담론, 이념을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책이다. 또한 뉴라이트가 일제통치, 이승만·박정희 통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들이 왜 민족과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고 승자와 강자에 집착하는지를 보여준다.
나온지 16년이 된 이 책이 다시 출판되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금 뉴라이트가 준동하기 때문이다. 책 내용도 16년 전과 다르지 않은 이유다. 김기협 역사학자는 재출판되는 이 책에 서문만 다시 썼다. <프레시안>에서는 김기협 학자가 새롭게 쓴 서문을 싣는다. 편집자
'뉴라이트' 이야기가 근래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그런데 16년 전과는 양상이 다르다. 그때는 '뉴라이트'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 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지목받는 사람들이 "저 아닌데요?" 발뺌한다. "그게 뭔데요?" 시치미도 뗀다. '뉴라이트'가 나쁜 말이 되어 있다.
원래 뉴라이트는 '합리적 보수'를 표방했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보수 정당의 패배 후 보수 진영의 위기의식 속에 새 깃발로 나선 것이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보수 정당이 승리하자 일등공신을 자처하고 나섰다.
'뉴라이트'가 이 사회에서 나쁜 말이 되어버린 것은 이때 승리에 들뜬 뉴라이트의 어지러운 행태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합리적 보수를 추구하는 진짜 뉴라이트가 아니라 잿밥만 보고 몰려든 사이비들의 행태였다. 잔치판이 너무 흥겹다 보니 뉴라이트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도 휩쓸려버렸고 극소수 진지한 사람들은 대오를 떠나버리기도 했다.
이 책의 비판 대상은 뉴라이트 이론에 앞장서다가 잔치판에 휩쓸려버린 사람들이다. 공부한 내용이 현실에 투영되는 것은 학인(學人)에게 큰 기쁨이다. 그런데 기쁨에 취해 공부를 현실에 꿰어맞추려 들면 공부가 망가지고 학인의 자세가 무너진다. 뉴라이트에게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찾고자 쓴 글이다.
'뉴라이트'가 나쁜 말이 된 것은 이 책에서 비판을 잘한 덕분이 아니다. 뉴라이트의 몰락은 그 이론의 한계와 문제점이 밝혀진 결과가 아니라 사이비 뉴라이트가 지나친 분란을 일으킨 결과다.
이 책 17장에서 '이 땅의 보수를 죽이려는가?' 따진 것은 이 사이비 행태를 표적으로 한 질문이다. 당시의 보수주의자들은 '권위주의 보수'를 벗어나 '합리적 보수'로 나아가고 싶었다. 합리적 보수의 이름이 될 수 있는 '뉴라이트'란 말을 제멋대로 쓰다가 나쁜 말로 만들어버린 것이 사이비들의 행태였고, 그로 인해 보수주의 이념의 발전이 가로막혔다.
사이비의 판별 기준은 '진정성'에 있다. 합리적 보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이퍼내셔널리즘(과잉민족주의)의 반성이 중요한 과제다. 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인가, 1948년인가? 일제강점기 이 땅 주민들의 국적은 대한민국이었나, 대일본국이었나?
이런 질문에 하이퍼내셔널리즘은 하나의 정답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진지한 보수주의자는 그 정답이 완전하지 못한 문제를 고민한다. 아무 고민 없이 그 반대쪽이 확고한 정답이라고 우기고 나서는 자들은 사이비다. 건국이 언제였나, 국적이 어디였나, 논의를 통해 이견을 좁히고 공감을 늘리기보다 편 가르기로 대립을 격화하는 데서 정략적 이득을 찾는 자들이다.
지금 상황이 '뉴라이트 시즌-2'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이비 시즌-2'”다. 더 이상의 '뉴라이트 비판'보다 '사이비 비판'이 필요한 상황이다. 사이비는 이득이 보일 때 창궐한다. 지금 그들에게 어떤 이득이 보이고 있나?
대립과 편 가르기가 화합과 협력보다 유리한 상황에 문제가 있다. 그런 상황의 중심에 '사이비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가 없던 사람이 덜컥 대통령이 되어 있다. 그는 대통령의 권력만 생각하지, 대통령의 책임은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수준이 높든 낮든 나름대로 자기 목표를 세워 꾸준한 노력을 쌓는다. 분란을 틈타 '어쩌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겐 그런 직업의식이 없다. 꾸준한 노력에 의한 '성공'이 아니라 화끈한 요행에 의한 '승리'만 바라본다.
임명권자의 이런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등용된다. 언론 관계 요직에 '반(反)-언론' 성향 사람들, 역사 관계 요직에 '반-역사' 성향 사람들을 골라 뽑는 것은 분란을 키우기 위해서다. 직책에 책임감을 갖고 분란의 해소에 힘쓰는 사람들은 '코드'에 안 맞는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의 보수를 죽이려는가?" 지금의 사이비 사태는 정치를 비롯해 이 사회의 모든 부문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중 치명적 피해를 입는 것이 보수 이념이고 보수 진영이다. 다른 부문의 피해는 원인이 제거되면 바로 치유되는 외상(外傷)인데, 보수 쪽 피해는 속이 망가지는 내상(內傷)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의 정의에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나는 변화에 대한 태도를 핵심으로 본다. 일체의 변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변화를 최대한 원만하게 받아들여 부득이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을 찾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서 독재시대까지 이 땅에는 보수주의가 설 여지가 없었다. 현실의 변화 필요가 너무 절박해서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변화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폭력독재가 끝나고 40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이 사회에도 지키고 아낄 만한 것이 많아졌다. 보수주의의 역할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권력은 아껴 쓸 때 힘이 늘어난다. 인사권의 발동이 조심스러워야 순조로운 효과를 바랄 수 있고, 거부권(재의요구권)은 행사하지 않아야 그 권위가 지켜진다. 권력자의 권력 오-남용은 국가제도를 마모시켜 붕괴를 재촉한다. 이번 사이비 사태의 수습 과정에서 보수다운 보수의 역할이 나타나기 바란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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