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골프, 뭣이 중한디?
[골프한국] 첫 홀은 일파만파 또는 무파만파, 심한 경우 누군가 첫 홀에서 버디를 하면 모두 올 버디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시니어 골퍼 중엔 첫 홀 티샷 전 캐디에게 "우리 사전엔 더블보기 이상은 없다"고 공표해 스코어카드에 더블보기 이상은 적지 않도록 주문하기도 한다. 요즘엔 마지막 홀을 올파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명랑골프'의 여러 모습들이다.
모처럼 만나 즐겁게 운동하며 우의를 다지려고 필드에 나왔는데 굳이 엄격한 규칙이나 스코어에 얽매어 기분을 망칠 필요가 있느냐는 게 명랑골프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변이다. 친교나 사교의 측면에서 보면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골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골프는 결코 끝나지 않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것은 다듬어진 자연에서 외롭게 헤매는 것이다. 골프는 혼자서 하는 것이다. 골프는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고 또 생각해야 할 것도 너무 많다. 골프는 인생 자체보다 더 인생 같은 것이다.'라는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데이비드 누난의 정의에 담긴 깊고도 오묘한 골프의 맛은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명랑골프는 '인간이 만들어 낸 놀이 중 가장 불가사의한 스포츠'라는 골프의 특성을 여지없이 무시하는 행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명랑골프에서 골프의 불가사의성은 실종되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흘린 땀에 비례하지 않는 속성, 아침에 깨달았다가도 저녁이면 잊는 망각성, 언제라도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예측 불허성, 결코 신체조건이나 체력으로 변별되지 않는 결과의 의외성, 인생보다 더 인생다움, 신기루처럼 달아나는 목표 등 골프의 불가사의성을 명랑골프에서는 맛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 골프 최대의 불가사의성은 '결코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집약하고 싶다. 과연 내 뜻대로 스윙을 날릴 수 있고 원하는 스코어를 낼 수 있었다면 누가 계속 골프채를 잡고 있을까 반문해 본다.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분노와 좌절, 후회를 하면서도 골프채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골프의 최고 매력은 '뜻대로 되지 않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를 닮은 사람이 바로 골퍼다.
슬렁슬렁, 대충, 화기애애하게, 후하게 인심 쓰고 농담 따먹기 하며 명랑골프를 즐기는 골퍼들이 한 타 한 타에 집중하며 모든 샷을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자세로 임하고 누가 보든 안 보든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며 혼신을 다해 라운드하는 골퍼의 참 재미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스코어가 아니라 그날 내가 몇 번이나 멋진 샷을 날리고 위험에 빠졌어도 어떻게 슬기롭게 탈출했는가에서 기쁨을 맛보는 골퍼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까.
명랑골프를 핑계 삼아 엉터리 스코어카드를 들고 흡족해하는 모습은 가짜 성적표를 들고 공부 잘했다고 자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오랜 기간 외국에서 근무하며 정통 골프를 익혀온 한 지인의 고백은 골프를 대하는 자세를 다시 생각케 했다.
외국에서 철저하게 룰을 지키며 정통 골프를 익혀온 그는 한국식의 명랑골프를 대하곤 너무 황당했다고 고백했다. 오케이가 어떻게 그렇게 후한지, 대수롭지 않게 벌타 없이 볼 터치를 하고, 너무도 너그럽게 멀리건을 주거나 벌타를 생략하는 분위기에 골프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골프의 마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아무리 규칙을 강조하고 규칙대로 해봐야 동반자가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라운드를 고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골프 품격을 지키기 위해 골프 레프리 자격시험에 도전했다. 골프 룰과 관련한 정식 자격을 따면 동반자들도 수긍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골프 레프리가 되려면 대한골프협회와 영국 왕립골프협회(R&A)가 공동 주관하는 실습교육과 평가시험을 거쳐야 한다. 분기별로 실시하는 룰 세미나에 참석해 이론과 실습교육을 받고 실제로 라운드하며 평가를 받는다. 평가 결과 상위 60% 이상의 성적을 얻으면 레벨1의 자격을 따고 90점 이상이면 레벨2 응시 자격을 받는다. 레벨2까지 통과한 뒤 종합평가에서 80% 이상의 점수를 얻으면 레프리 자격을 얻는다. 국내 KPGA투어나 LPGA투어 대회의 심판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지인은 레벨1을 통과한 뒤 레벨2 준비를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룰을 제대로 지키며 라운드를 해온 뒤 골프의 재미가 한층 심화되었다는 지인의 고백이다. 지인 스스로는 물론 함께 라운드한 동반자들도 처음엔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차츰 룰대로 플레이하는 데 익숙해지면서 흡족해한다고 털어놨다. 물론 여전히 분위기가 너무 삭막해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동반자도 없지 않았으나 룰대로 플레이하는 조금씩 적응해가면서 재미가 깊어지고 기량도 향상돼 골프의 묘미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마워한다고 전했다.
'골프에서 뭣이 중한디?' 스스로에게 이런 자문을 해볼 것을 권한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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