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초 정치적 ‘여혐’의 희생자” 마리 앙투아네트

이한수 기자 2025. 10. 1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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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793년 10월 16일 38세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1775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에 대해 박정자 상명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사상 최초로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女嫌)의 희생자였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장편소설 ‘마리 앙투아네트’ 번역서 서문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포르노그래피’ 덕분에 성공한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2017년 12월 28일 자)

혁명 세력은 앙투아네트가 ‘무절제한 쾌락’을 일삼았다고 여론을 선동했다. 동성애는 물론이고 왕비의 오빠, 시할아버지, 시동생, 심지어 여덟 살 아들과도 근친상간을 했다고 조작했다.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했다는 근거 없는 말도 널리 퍼졌다.

프랑스 대혁명은 '앙투아네트 때리기'로 성공. 2017년 12월 28일자.

루이 16세에 대해서는 비인격적인 중상 비방이 거의 없었다. 반면 왕비를 향해서는 온갖 추악한 음담 패설이 동원됐다. 남성의 권력과 통치는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혐오를 보인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지금까지도 권력자와 가까운 여성의 사치 문제 등이 불거질 때 악의적 맥락에서 다시 등장한다.

사치스러웠던 것은 사실 아닐까?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화장품과 궁전의 실내 장식에 과도한 액수를 사용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런 정도의 지출은 다른 왕비와 같은 수준이었고, 이것이 나라를 망칠 정도는 물론 아니었다”면서 “문제는 그런 행위가 사람들 눈에 띄었다는 점이고, 그래서 ‘적자(赤字) 부인’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덧붙어졌다”고 했다.(2012년 7월 12일 자)

마리 앙투아네트 '목걸이 사건'을 다룬 책 서평. 2004년 5월 15일자.

‘왕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관계가 없었다.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인 라 모트 백작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려고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로앙 추기경은 백작부인이 거짓으로 꾸민 왕비의 편지에 속아 보석값을 대신 지급했고, 백작부인의 하수인에게 목걸이를 맡긴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왕비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대중은 오히려 ‘피해자’인 왕비를 비난했다. (2004년 5월 15일 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만 14세 때인 1770년 왕세자이던 한 살 위 루이 16세(1754~1793)와 결혼했다. 1774년 루이 16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해 왕비가 됐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7년간 아이가 없었다. 7년이라지만 둘 다 20대 초반이었다. 루이 16세 성기의 포피가 문제였다고 한다. ‘매우 간단한 수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 후 2남 2녀를 낳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서 공개. 2021년 10월 4일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남편 아닌 연인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1월 4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웨덴 귀족 악셀 폰 페르센 백작에게 편지를 썼다. “난 당신 없이는 안 돼요.” 그동안 이 편지의 내용은 읽을 수가 없었다. 문장 위에 글씨를 덧칠해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21년 소르본대 연구팀은 엑스(X)선 기술을 이용해 덧칠한 글씨와 원래 글씨를 구분해 해독했다.

연구팀은 1791년 6월부터 14개월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 백작이 주고받은 15통 편지 중 8통을 완전히 해독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에서 “나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당신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어요” 같은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표현을 썼다.(2021년 10월 4일 자)

주경철 교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정적 실책을 이렇게 서술했다.

“정치와 외교에는 전혀 감각이 없으면서도 친정인 오스트리아 측의 압박을 받아 간혹 남편인 국왕에게 무리한 요청을 하기도 했다. 억지스러운 부탁을 들어줄 리는 없었지만, 나중에 혁명 재판에서는 실제로 이런 것들이 반혁명 죄의 사유가 되었다. 그녀가 주도한 가장 멍청한 일은 혁명이 한참 진행되는 도중에 왕실 사람들이 모두 초대형 왕실 마차를 타고 탈출을 시도한 소위 바렌 도주 사건이다. 이는 왕실이 배신자로 낙인찍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2012년 7월 12일 자)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2019년 10월 25일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리는 참형을 당했다. 앞서 1월 21일 남편 루이 16세도 같은 형을 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 직전 루이 16세의 여동생인 시누이 엘리자베트에게 편지를 썼다.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지극히 평온합니다.” 그는 파리 콩시에르주리 감옥에서 나와 처형장인 콩코르드 광장 단두대 앞에 섰다. 그때 사형 집행자 발을 실수로 밟았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위키백과)

마리 앙투아네트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작가 이케다 리요코 인터뷰. 2024년 7월 20일자.

화려한 삶과 비극적 죽음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화·만화·소설·뮤지컬 등에서 많이 다뤄진다. 앙투아네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원작자 이케다 리요코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매우 순수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죽음 직전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고 고귀하게 죽어간 그 여인의 일생에 매료됐다”(2024년 7월 20일 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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