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유소 / 출처 : 연합뉴스
중동발 원유를 실은 마지막 유조선이 20일 충남 대산항에 도착한 뒤, 한국으로 향하는 유조선은 사라졌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다.
전 세계 원유 수송의 20%가 지나는 이 해협은 한국 수입 원유의 70%가 의존하는 중동산 에너지의 생명줄이다.
그런데 이란이 “적국 외 선박은 협의로 통과 가능하다”며 ‘선별 통과’ 카드를 꺼내들자, 중국·인도·일본은 물밑 협상에 나섰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란 주재 대사관을 유지하면서도 직접 협상에는 선을 그었다.
협상 주도하는 중·인·일, 한국은 ‘제재 공조’ 선택

주유소 / 출처 : 연합뉴스
22일 유엔 산하 국제해사기구(IMO)에서 이란 대표는 “적국 연계 선박 외 모든 선박에 해협이 개방돼 있다”고 밝혔다.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선트마저 17일 “이란, 인도, 중국 일부 선박 통과는 괜찮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호르무즈 질서는 다자 규범에서 ‘양자 협상 중심’으로 재편되는 모양새다.
일본은 협의를 통한 통과 허용 가능성을 타진했고, 중국과 인도는 실무 접촉을 본격화했다. 이란이 8,000개 이상의 군사 목표물을 타격당하고 함정 130척이 파괴된 상황에서도, 해협 통제권만큼은 놓지 않으려는 의도다.
반면 한국은 청해부대 활동 강화, 우회 항로 검토, 에너지 다변화 등 ‘간접 대응’에 방점을 찍었다. 외교부는 “이란 등 관련국과 소통은 유지하되, 직접 협상은 진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 내부에서는 “특정국만을 위한 예외 협상이 국제 제재 공조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서방 동맹국 중에서도 이란 대사관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지만, 대(對)이란 제재 틀과 한미 동맹이라는 구조적 제약은 명확하다.
동맹 논리와 실익 사이, ‘선택 강요’ 가능성

호르무즈 해협 / 출처 : 연합뉴스
한국의 에너지 의존 구조는 극단적이다. 수입 원유의 약 63%(70% 중동 × 90% 호르무즈 경유)가 사실상 이란의 통제 아래 놓인 셈이다.
골드만삭스는 브렌트유 전망치를 배럴당 76달러로 10달러 상향 조정했고, 현재 유가에는 이미 13달러의 리스크 프리미엄이 반영돼 있다. 모건스탠리는 “전쟁이 빠르게 끝나도 공급 차질은 수주간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중국처럼 이란과 양자 협상에 나설 경우, 미국의 대이란 제재 위반 논란과 동맹 신뢰 훼손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여의도 정가 관계자는 “한국 선박이 정치적 협상 대상으로 부각되면, 오히려 추가 압박 카드로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란이 국가별 통과 조건을 차등 적용하는 기조를 본격화할 경우, 한국 역시 ‘실익과 외교적 부담’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68일분 비축유와 4월 이후 공급 시나리오

호르무즈 해협 / 출처 : 연합뉴스
국내 정유업계의 실질 비축유 재고는 68일분에 불과하다. 4월 도착 예정 유조선은 전년 대비 7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공급 회복 시점은 골드만삭스 기준 4월 중순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는 전쟁이 조기 종료될 경우의 낙관 시나리오다. 미국의 대이란 작전이 22일째 지속되고 있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여전히 해협 통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향후 변수는 두 가지다. 첫째, 이란의 실제 통제 수준이다. 현재는 선언적 수위에 그치지만, 실제 검문·나포 사례가 발생할 경우 한국도 대응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다.
둘째, 선별 통과 정책의 확대 여부다. 이란이 협상 대상국을 늘려갈 경우, 한국이 ‘협상 불참국’으로 분류되면서 에너지 수급에 추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동맹 논리가 우선이지만, 공급 차질이 2개월 이상 장기화되면 정부도 선택지를 재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한국의 ‘침묵 외교’는 동맹 신뢰와 에너지 안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시간을 버는 전략이다. 그러나 호르무즈 질서가 양자 협상 중심으로 재편되고, 공급 차질이 현실화되는 4월 이후에도 이 원칙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란의 통제 수위와 미국의 제재 완화 신호가 향후 정국의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