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54>] 재산 몰수·채권자 처형… 재정 위기 맞은 ‘철의 왕’의 묘책
프랑스의 미남왕(美男王·Le Bel) 필리프 4세(Philippe IV·이하 필리프)는 냉혹한 성격 때문에 친구조차 그를 철의 왕(le Roi de fer)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삼아 ‘군주론’을 썼다고 여기지만, 냉혹함에서체사레 보르자는 결코 필리프를 따라갈 수 없다. 필리프의 정적(政敵)이었던 파미에르 주교가 그를 두고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영혼 없는 조각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국책 사업 실패와 재정 파탄
필리프는 1294년 영국과 전쟁, 1297년 플랑드르(벨기에) 내전을 촉발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전쟁은 국가가 벌이는 투기적 사업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금(배상금)과 함께 더 큰 영토와 인민(시장)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천연가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독일이 막대한 인플레이션 부담에도 불구하고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전후의 재건 사업과 시장 확대를 염두에 둔 측면이 있다.
필리프의 국책 사업 실패, 즉 영국과 성과 없는 전쟁과 플랑드르 내전으로 프랑스는 재정 파탄에 직면했다. 프랑스는 전쟁 중 디밸류에이션(devaluation), 즉 화폐가치(귀금속 함량)의 인위적 감소를 통해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성공했지만,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전쟁 후 리밸류에이션(revaluation), 즉 화폐가치의 인위적 절상을 통해 심각한 경기 침체를 초래했다. 오늘날에 빗대자면 전쟁 중에는 과격한 금리 인하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전쟁이 끝난 뒤엔 급격한 금리 인상을 통해 디플레이션을 유발한 것이다. 경기 침체로 모든 국민이 가난해졌기 때문에 국가의 세수도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필리프는 기발한 정책을 고안해 낸다.
부정 축재자의 재산 몰수
중세 서구 사회는 대부업을 금기시했다. 당시 사회는 생산(노동)을 통해서만 이윤(과실)을 창출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대출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을 빌리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슬람 금융(Islamic Banking), 즉 대출금의 이자 대신 선물(물건)을 받는 형태의 거래는 이 같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은 이러한 율법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대부업에 뛰어들 수 있었고, 곧 유럽의 대출 시장을 독점하게 됐다.
필리프는 이자 수취를 금지한 가톨릭 율법을 내세워 유대인을 프랑스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필리프의 숨겨진 의도는 그들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필리프는 국가 재정의 20%에 해당하는 귀금속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자 다시 유대인의 입국을 허락하고 고액의 허가비를 징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재정 파탄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과감한 정책을 사용하기로 한다.
교회에 대한 과세
1296년 필리프는 프랑스 내 성직자에게 연간 소득의 절반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내 교회 재산을 프랑스 왕실로 이전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했다. 필리프는 금괴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교황청에 보복했다. 프랑스의 기부금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높았던 교황청은 1297년 프랑스 국왕이 ‘비상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데 동의했다. 필리프는 비상시를 ‘평상시’로 확대 해석해 이익을 챙겼다.
1301년 필리프는 교황파인 파미에르 주교를 반역죄로 체포했다. 교황이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로마에서 공회의를 소집하자, 필리프는 교황을 비난하기 위해 파리에서 비(非)교황파 주교, 귀족, 대부르주아로 구성된 의회를 소집했다. 이 의회는 500년 뒤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삼부회(États généraux)의 전신이다. 프랑스 의회가 필리프를 지지하자, 교황은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 권력의 우월성을 선언한 교황 칙서(Unam Sanct-am·1302)를 선포하고 필리프를 파문했다. 파문이란 단순히 기독교인의 지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의정당성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교황이 승리감에 도취해 아나니 별장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중, 필리프는 자신의 신하 기욤 드 노가레를 보내 교황을 타격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명화 ‘스카페이스’에서 콜롬비아 마약상 소사가 별동대를 보내서 방심하고 있던 토니 몬태나(알 파치노)를 무자비하게 기습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1309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하자 필리프는 프랑스 대주교 베르트랑 드 고트를 새로운 교황 클레멘트 5세로 선출해 버린다. 이로 인해 교황청이 프랑스 영토인 아비뇽으로 이전되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1309~76)’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교황이 난립하는 ‘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구에서는 국가의 세속화(secularization)가 진행된다.
국가 부채 탕감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 빈치 코드’로 유명해진 템플기사단(Templar)은 원래 12~13세기 십자군의 동방 원정 중 기독교 순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전쟁 이후 템플기사단의 성채는 동서 교역의 중심지가 됐고, 이들은 수많은 기부금을 바탕으로은행업을 영위하게 됐다. 필리프도 템플기사단에 상당한 채무를 지고 있었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새벽, 필리프의 군대가 파리의 템플 사원을 습격해 수백 명의 템플 기사를 체포했다. 템플기사단은 파리에 거점이 있지만 교황 직속의 군대로서 세속 군주의 통치권 밖에 있었고, 필리프는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필리프는 종교재판소를 열어 템플 기사들을 고문했고, 자백을 강요해 화형을 내렸다. 이 사건의 명분은 종교재판이었지만 그 실질은 채권자 살해를 통한 채무 면탈이었다. 템플기사단 해체와 함께 프랑스의 모든 국가 부채는 소멸했고, 필리프는 건전한 국가 재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초대 기재부 장관이 던진 화두
필리프의 행보는 국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8월 13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강만수 초대 기획재정부장관의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도전실록’에 대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강만수 전 장관은 출판기념회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화두를 남겼다. ‘국가란 무엇인가’ ‘공직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국정에 임해야 하는가’.
특히 환율과 관련해 그가 남긴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미국은 종이만 있으면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나라다. 우리는 어떠한가. 외국인이 한국을 ‘아시아의 ATM’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 이후 수년 동안 국내 대기업이 천문학적 이익을 낸 것이 그들의 탁월한 영업 능력 때문이었을까. 신흥국 중앙은행이 말하는 ‘금리 인하→원화 가치 절하→외화 유출’ 메커니즘 때문이었을까.” “일본은 왜, 어떻게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했을까.” “미국 경제학은 신흥국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적 이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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