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자진사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오기노 감독의 ‘레오 포기’...감독의 이상과 현실 간의 지나친 괴리가 불러온 실패였다 [남정훈의 오버 더 네트]

남정훈 2025. 3. 2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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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 사령탑의 평소 철학이나 이상이 현실의 승리와 부딪힐 때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사령탑의 철학이나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현실에서도 승리, 나아가 리그 우승을 가져오는 것이다. 가장 악수(惡手)는 철학과 이상에도 반했음에도 현실에서 승리를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철학을 조금 포기해서라도 현실에서 승리, 우승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를 고수하는 게 감독의 몫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스포츠단은 감독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포츠 구단은 선수들과 프런트 개개인의 생계의 장이며 팀 성적은 그들의 연봉과 고과에 직결된다. 아울러 팬들은 언제나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원한다. 고로 감독이 자신의 철학과 이상을 고집하다 팀 성적을 추락하게 만든다면? 많은 권한을 준 만큼, 이에 직접 책임을 져야한다. 여기서 책임은 딱 하나밖에 없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남자 프로배구 OK저축은행의 2년차 사령탑 오기노 마사지 감독이 자진사퇴했다. OK저축은행의 2024~2025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지난 20일 현대캐피탈전 세트 스코어 0-3 완패 이후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OK저축은행의 올 시즌 성적표는 7승29패. 남녀부 통틀어 압도적인 최하위였다. 승점자판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약 기간은 아직 1년이 더 남았지만,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에서 한 시즌 만에 팀을 최하위로 추락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졌다. 오기노 감독의 자진사퇴 역시 자신의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오기노 감독은 구단을 통해 “OK저축은행 감독으로서 선수들, 팬과 함께한 지난 두 시즌은 매우 뜻깊었다. 그간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라며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팀이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읏맨 배구단이 더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오기노 감독은 부임 초기부터 일본 스타일의 배구를 OK저축은행에 이식하려 했다. 서브의 위력을 인위적으로 줄여서라도 범실을 최소화하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인 상대의 세트 플레이를 블로킹과 디그로 제어하려는 배구를 시도했다.

오기노 감독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배구의 실현을 위해선 반격 과정에서 결정적 있는 한 방을 때려낼 수 있는 걸출한 공격수가 필요했다. 그게 부임 첫 해인 2023~2024시즌엔 가능했다. 역대 최고의 외인인 레오(쿠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2m6의 장신에 높은 점프력이 더해진 타점으로 언제든 상대 블로킹 위에서 공격이 가능한 레오는 팀 동료들이 어렵게 받아올린 공을, 리시브가 흔들려 이단 연결되어 올라온 공을 리그 내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때려줄 수 있는 선수였다. 레오의 존재 덕분에 오기노 감독과 OK저축은행은 2023~2024시즌을 정규리그 3위로 마친 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결정전 진출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팀은 조금만 더 전력을 보강하고, 시스템을 가다듬는다면 대권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기노 감독은 자신의 이상을 한 발 더 실현하려 했다. 특정 공격수에게 의존하지 않는 토털 배구였다. 이는 곧 레오와의 동행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쉬운 승리 방정식을 포기하고, 다시 새 판을 짜려한 것이다. 
오기노 감독은 프런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레오와 재계약하지 않고 새로운 배구를 찾아 나섰고, 이는 처참한 실패를 가져왔다.

지난해 5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은 오기노 감독의 시험대였다. 결과는? 대참사에 가까운 실패였다. 오기노 감독이 직접 뽑은 마누엘 루코니(이탈리아)는 시즌 초반 5경기에서 단 29점, 공격 성공률 35.29%에 그친 뒤 기량 미달로 퇴출됐다. 루코니 대신 데려온 크리스(폴란드)도 30경기 220점, 경기당 평균 10점도 내지 못하는 빈곤한 득점력으로 ‘폭망’했다.

냉정히 말해, 레오가 없는 OK저축은행의 토종 선수층으로는 토털배구를 구현하기에는 구성원 구성 자체가 무리가 있었다. OK저축은행에는 현대캐피탈의 허수봉처럼 외국인 선수에 버금가는 파괴력 있는 토종 공격수가 없다. 대한한공의 정지석-곽승석 라인처럼 팀 시스템의 핵심이 되어줄 수 있는 공수겸장의 아웃사이드 히터 자원도 없다. 이런 선수단 구성 속에서는 외국인 선수 기량의 비교 우위를 앞세우고, 토종 선수들의 장점을 모아 명확한 롤을 부여하는 게 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오기노 감독은 팀 내 구성원들의 기량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려 했고,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오기노 감독의 배구철학을 대표하는 기조인 ‘범실 없는 서브’도 현대 배구 트렌드에는 전혀 맞지 않는 전술이었다. 범실을 줄이기 위해 위력을 낮춘 OK저축은행의 ‘물 서브’를 받은 상대팀들은 쉽게 받아올려 다양한 공격 옵션으로 OK저축은행 코트를 폭격했다. 올 시즌 OK저축은행의 서브 범실은 300개로 가장 적다. 서브 최소 범실 2위인 삼성화재(444개)와 비교해도 144개나 적었다. 그러나 이는 전혀 OK저축은행의 성적 향상에 도움 되지 않았다.

정규리그 1~3위인 현대캐피탈, KB손해보험, 대한항공이 팀 서브득점 1~3위에 올라있다는 것은 오기노 감독의 배구가 틀렸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팀 공격 성공률이 30% 후반대~40% 초중반을 오가는 여자배구와는 달리 남자배구는 리시브가 잘 되면 속고이나 퀵오픈, 파이프(중앙 후위 공격) 등 상대 블로커들을 교란할 수 있는 확률 높은 공격 옵션을 사용해 50%가 훌쩍 넘는 공격 성공률을 올릴 수 있다. 이는 곧 범실을 감수하더라도 서브 득점을 노리고, 서브 득점이 되지 않더라도 최대한 상대 리시브를 흔들어 2∼3명의 블로킹이 달려들 수 있는 오픈 공격을 강요하는 게 더 효율적인 배구라는 얘기다. 오기노 감독은 수동적인 배구로 일관하다 처참한 결과를 받아든 것이다.

하나 더. 레오는 토털배구에도 맞는 조각임이 올 시즌 증명됐다. 트라이아웃 시장에 다시 나와 현대캐피탈에 입단한 레오의 올 시즌 공격 점유율은 33.3%에 불과했다. 허수봉이라는 토종 NO.1 공격수와 신펑, 전광인으로 이어지는 양질의 날개 자원, 최민호-정태준의 미들 블로커까지 모든 포지션에 리그 평균 이상의 공격수들이 있으니 레오가 팀 공격의 40∼50%를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오기노 감독이 토털배구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해야할 것은 레오와의 재계약 포기가 아니라 토종 구성원들의 전력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게 먼저였던 셈이다. 
OK저축은행은 “빠른 시일 내에 후임 감독 선임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며 다양한 후보를 검토해 OK 읏맨 배구단을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신임 감독을 선임하겠다”는 입장이다. 과연 오기노 감독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OK저축은행의 새 사령탑은 누가 될까. 들리는 얘기로는 또 다른 일본인 감독이 올 것이라는 관측도 있고, 경험 많은 국내 사령탑이 새 감독으로 부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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