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40도 백두산서 살아남은 탈북민…“암투병 중에도 아버지 역할 해내려 삽니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2026. 11. 8. 09:0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북한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다.

양강도 혜산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다 중퇴한 35세 조 씨를 비롯해 북한 특수부대 군관 출신 40대 남성 인솔자와 25세, 24세인 자매, 그리고 중학교 졸업반 나이인 17세 소년이었다.

이전에 중국에 와서 1년 동안 한족들과 일하며 중국말을 배웠던 조 씨는 의사소통할 수가 있었다.

중국을 횡단해 동남아 국가로 넘어가 수개월 감옥 생활을 하고 한국에 들어온 때가 2012년 12월 25일이었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며 강인한 삶을 이어 나가는 조영남 씨.

북한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다. 경제난으로 1995년부터 약 3년 동안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

고난의 행군은 원래 1938년 말부터 1939년 초까지 약 100일 동안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끈질긴 토벌대의 추격을 받았다는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 김일성 부대는 백두산에서 혹한과 굶주림으로 거의 궤멸 상태까지 몰렸다가 끝내 추격을 따돌렸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은 중국 공산당 ‘대장정’에서 영감을 얻은 표현이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 휘하 홍군 약 9만 명은 장시(江西)성을 떠나 1년 동안 약 9000㎞를 행군해 산시(陝西)성에 도착했다. 전체의 약 3%인 3000여 명만 장정을 완수했다.

북한과 중국은 극적인 생존 서사를 공산당 정통성의 핵심 근간으로 삼고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통치 이념으로 활용하고 있다.

2012년 한국에 입국한 조영남 씨(50)는 고난의 행군이나 대장정보다 더 가혹한 시련을 21세기에 겪었다. 가장 추운 시기에 다른 4명과 함께 탈북했다가 백두산 원시림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일행은 하나둘씩 추위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조 씨도 정신을 잃었다가 나흘 만에 구조됐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한국으로 왔다.

허나 고진감래라는 말은 조 씨의 50년 인생엔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에 와서도 그는 여전히 고난의 행군 중이다.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그는 간암 치료를 받으며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겨울 백두산 원시림. 길을 잘못 들면 살아남기 어려운 극한의 환경이다. 동아일보 DB

● 백두 원시림에서 길을 잃다

조 씨 일행이 탈북한 날은 2011년 12월 31일 저녁이었다. 설날 전날은 경계가 비교적 허술하다는 것을 노렸다.

일행은 모두 5명. 양강도 혜산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다 중퇴한 35세 조 씨를 비롯해 북한 특수부대 군관 출신 40대 남성 인솔자와 25세, 24세인 자매, 그리고 중학교 졸업반 나이인 17세 소년이었다. 모두 한마을에서 친하게 지던 사람들이었다.

얼어붙은 압록강 상류를 넘어 안내자가 안다는 중국 조선족과 접선하는 것까진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날 밤 승합차를 타고 내륙으로 이동하던 중 도로에서 불심 검문을 펴던 중국 공안을 맞닥뜨렸다. 차를 돌려 백두산 가는 길로 달아났지만 공안의 추적은 집요했다. 어느 순간 조선족이 말했다.

“저 굽이를 돌자마자 차에서 내려 산으로 뛰시오. 우린 공안을 유인해 계속 가겠소. 아무 마을이나 들어가 나한테 전화하면 찾아가겠소.”

조 씨 일행은 차에서 내려 산속으로 냅다 뛰었다. 특수부대 출신 인솔자는 눈을 헤친 일행의 발자국을 따라 공안이 따라올까 봐 “너넨 이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뛰고 저기 보이는 나무에서 합세하자” 같은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밀림 속으로 도망쳤다. 마침내 공안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 부락을 찾아보기로 한 때는 이듬해 1월 1일 오전 3시경이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도로를 찾아 내려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백두산 1월 새벽 체감온도는 영하 40도를 오르내린다.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 도망쳐 온 곳으로 돌아가려니 공안과 마주칠까 봐 무서웠다. 인솔자는 군에서 배운 대로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정했다.

“저기 봉우리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면 연기 나는 곳을 찾을 수 있겠지. 공안이 따라와도 어느 능선을 타고 뛸지 정하기도 쉬울 거야”

몇 시간을 걸어 날이 밝은 뒤 산봉우리에 이르렀지만 내려다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허리까지 오는 눈을 헤치며 온 터라 배도 고팠다. 일행은 눈속에서 산열매를 따고 도토리를 주웠다. 설날이라고 차례상 차리듯 산열매를 쌓아놓고 소원도 빌었다. 너무 추워 힘들게 모은 도토리는 돌처럼 단단해져서 버릴 수밖에 없었고 산열매도 입에서 힘들게 녹여 삼켜야 했다.

처음 보는 탐스러운 빨간 열매도 있었다. 씹어보던 인솔자는 “맛도 비리고 정체도 알 수 없다”며 이 열매를 모두 버리게 했다. 불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공교롭게도 하나뿐인 라이터가 라이돌이 나가는 바람에 쓸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얼어 죽을 수밖에 없기에 일행은 무작정 길을 떠났다.

조영남 씨가 한국에 입국한 직후 강원도 한 마을에서 북한 부엌과 유사한 부엌을 발견해 불을 피우고 있다. 조 씨에게 불은 죽을 때까지 한을 부르는 단어가 될 것이다.

● 17세 소년의 죽음

몇 시간쯤 지났을 때 17세 소년이 갑자기 주저앉아 피를 토했다. 핏줄이 두드러지고 눈이 빨갛게 변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소년은 버렸던 정체불명의 그 빨간 열매를 다시 주워서 일행 몰래 먹었던 것이다.

정신을 잃어가는 소년을 안고 조 씨는 절망에 몸부림쳤다. 한마을에서 살며 친척처럼 가깝게 지낸 아이였다. 기차역에 나가 석탄을 주워서 앓는 어머니와 동생을 먹여 살리던 씩씩한 소년이었다. 조 씨를 따라 중국에 와서 돈을 벌어 가족을 살리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마침내 심장이 멎어 축 늘어져 버린 소년을 눈 속에 묻고 일행은 길을 떠났다. 그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그 앞에서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움직여야 남은 사람들도 살 수 있었다. 조 씨 머리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고통이 새겨졌다.

한참을 가니 다시 밤이 됐다. 그래도 쉴 수 없었다. 사투가 시작됐다. 다음 날에도 민가를 찾지 못했다.

기적이 찾아온 것일까. 3일 오후 늦게 마침내 작은 도로를 발견했다. 도로를 따라가니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오두막 같은 벌목용 산장이 나타났다. 산장에서 40대 중후반의 산적처럼 생긴 우람한 체구의 조선족이 나왔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연변(延边) 허룽(和龙)시라고 했다. 사흘 동안 꼬박 걸어 수백 리 떨어진 곳까지 온 것이다.

사연을 들은 조선족은 방에 들어가 있으면 밥을 해주겠다고 했다. 방에 들어간 일행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사흘째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으며 모두가 동상을 입은 상태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비명에 깨어나 보니 조선족이 잠들었던 여자 옷을 강제로 벗기고 있었다. 범행에 실패하자 조선족은 부엌으로 나가 솥에 있던 밥을 모두 퍼서 개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트랙터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문밖으로 자물쇠를 걸어 따라 나갈 수도 없었다.

남은 것은 가마에 붙은 누룽지와 따뜻한 구들뿐이었다. 누룽지 절반을 넷이 나눠 먹었다. 인솔자는 남은 절반을 다시 반으로 갈라 여자들에게 각각 나눠주었다.

“공안을 데리고 올 가능성도 높으니 일단 너희가 품고 있어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아꼈다가 나중에 먹어라.”

방을 살펴보니 출입문과 반대 방향 벽에 몸이 겨우 빠져 나갈만한 뙤창이 보였다. 그곳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한밤중 영하 30도 넘는 산속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일행은 합의를 보았다.

“설마 사람인데 공안을 데려오는 짐승 같은 짓이야 할까. 그냥 자기 집에 갔을 수도 있는 거겠지. 공안이 오면 멀리서 불빛과 차 소리가 들릴 테니 그때 도망가자.”

하지만 설마는 현실이 됐다. 한밤중 여러 대 차가 올라오는 소리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행의 귀에 들렸다.
“도망쳐.”
먼저 여자들부터 뙤창으로 밀어 넣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도망가.”

인솔자를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조 씨가 빠져나갔다.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서 괴력이 나왔다. 그마저도 몸이 삐쩍 마른 상태라 가능한 일이었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는 순간 손바닥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픈 곳을 살펴볼 새도 없었다.

공안들이 문 앞에 당도했다. 인솔자는 보였지만 여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바닥을 보니 깨진 유리가 박혀 있었다. 떨어진 핏방울을 보고 공안이 따라올까 봐 옷으로 손을 감싸고 정신없이 뛰었다. 뒤돌아 보니 전짓불들이 오두막 주변을 휘젓고 있었다. 하지만 숲까진 따라오지 않았다.

조영남 씨가 봉사활동을 나가 한 노인의 손을 마사지하고 있다. 조 씨는 한국에 와서 한 탈북민 단체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매월 한두 번은 반드시 봉사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벌써 12년째다.

● 차례로 얼어 죽어갔다

숲에 들어가 손바닥에서 유리를 뽑아냈다. 그때 생긴 큰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신경도 함께 다쳐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펴지 못한다. 예술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조 씨에겐 치명적인 상처다.

한국에 와서 병원에 가 보니 800만 원이면 신경 복원 수술로 고칠 수 있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도 조 씨 자신을 위해 쓸 800만 원은 없다. 동상 흔적도 온몸에 남았다. 겨울만 되면 귀에서 진물이 흐른다.

일행은 여자 둘과 남자 둘로 나뉘어 흩어졌다. 공안이 들을까 봐 소리쳐 부를 수도 없었다. 한자리에 머물다간 얼어 죽기에 어쨌든 움직여야 했다.

밤새 산을 헤매다 4일 아침 굴이 하나 보였다. 들어가면 바람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솔자가 손을 더듬거리며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엄청나게 큰 곰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혼비백산해 도망 치느라 그나마 남은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날 낮은 여자들을 찾아 헤매는 데 다 썼다. 나흘 동안 거의 먹지도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오후 늦게 더 움직일 힘이 없을 때 멀리 나무 밑에서 빨간색 같은 것이 보였다. 가 보니 자매가 눈에 반쯤 파묻힌 채 서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둘 다 벌써 숨이 멎었더군요. 언니는 하나뿐인 목도리를 동생 목에 감아주곤 꼭 안고 있었어요. 언니 몸은 차갑게 굳었는데 동생은 아직 따뜻하더군요. 주머니에 넣어준 누룽지를 먹지도 못하고 죽었어요. 제가 그 애들을 죽인 겁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 씨지만 그때를 회상하던 순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언니는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기악도 잘했다. 하지만 부모가 일찍 굶어 죽은 탓에 자매는 어린 나이부터 산에서 나무를 해 장마당에 팔며 생계를 이었다. 그게 안쓰러워 조 씨는 언니를 자신이 있던 선전대에 추천해 뽑았다. 탈북하기 전 인솔자는 조 씨에게 슬쩍 말을 던졌다.

“내가 중국에 아는 식당 사장이 있는데, 젊은 여자가 거기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 혹시 아는 여자 있으면 같이 가면 좋겠어.”

인솔자는 조 씨네 집 근처에 살던 친근한 이웃이었다. 조 씨네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선뜻 달려와 일손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를 믿고 조 씨는 이 여성을 떠올렸다.

“중국 가서 식당에서 몇 달 일하면 여기서 몇 년 먹을 돈을 번대. 이번에 중국 갈 건데 같이 갈 생각이 있으면 얘기해.”

언니는 다음 날 그를 찾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혼자 동생을 두고 떠날 순 없어요. 둘이 같이 가도 괜찮다면 가겠어요.”
인솔자에게 말하니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좋아했다.

돈을 벌겠다고 나섰던 자매는 그렇게 백두산 어느 능선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자매 시신까지 보니 더는 움직일 힘이 없었다. 둘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몸은 점점 굳어져 갔다.

‘우리도 이렇게 잠들다가 죽는구나.’
불이라도 있었다면 그들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었다. 라이터 하나 없어 얼어 죽는 것이다. 새벽녘 인솔자가 희미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영남아, 내가 벌을 받는가 보다. 실은 내가 저 애들을 식당에서 일 시키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내가 거래하던 중국 사장이 팔릴 만한 여자들을 데려와 달라고 해서 함께 온 거야. 미안하다.”

얼마 안 돼 그는 조 씨 무릎을 베고 숨을 거뒀다. 슬픈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미 조 씨 몸도 굳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m 앞에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소리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조영남 씨가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하면서 찍은 증명사진.

● 기적적인 소생

눈을 뜨니 어느 오두막 안이었다. 지켜보던 노인이 중국어로 뭐라 말했다. 이전에 중국에 와서 1년 동안 한족들과 일하며 중국말을 배웠던 조 씨는 의사소통할 수가 있었다.

나흘 만에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조 씨 일행이 쓰러진 곳은 잣나무밭이었다. 산 주인은 따로 있어 겨울에 사람을 고용해 잣나무 밭을 관리하게 하는데, 그 잣나무밭은 한족 노인 내외가 지키는 곳이었다. 잣나무밭도 보고 밤새 올가미에 산짐승이 걸렸는지 살펴볼 겸 일찍 오두막을 나섰던 노인이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했다.

조 씨만 겨우 숨이 붙어 있었다. 조 씨는 20대에 전국대학생마라톤대회에서 3시간17분 기록으로 완주한 경력도 있다.

조 씨는 그 오두막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내외는 그를 정성껏 돌봤다. 녹두를 사와 동상을 치료해 주고 약도 지어 먹였다. 생명의 은인이었다. 일행 시신도 내외가 묻어 주었다고 했다. 조 씨는 차마 그들이 묻힌 자리에 다시 갈 수가 없었다.

4월 초가 되자 내외가 걱정하기 시작했다. 봄이면 일꾼들이 산에 올라오는데, 신고가 들어가면 서로 피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조 씨는 작별 인사를 하고 오두막을 떠났다. 연변 안투(安图)현에 찾아갈 만한 집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1년 전인 2011년 그가 7개월 동안 일했던 마을의 촌장 집이었다.

조 씨가 처음으로 중국에 건너온 때는 34세 때인 2010년 여름. 탈북하려고 넘어온 것도 아니었다. 30년 넘게 압록강 옆에서 살면서 탈북을 시도하지 않던 그가 결국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데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1976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양강도 혜산에 있는 외할머니집에서 컸다. 부친은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잘 나가는 무역 일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심장병을 앓다 보니 자식을 돌볼 수가 없어 외가에 그를 맡긴 것이었다.

그가 13세 때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양강도로 추방돼 왔다. 큰 잘못은 아니었는지 처음엔 도 간부로 임명됐다. 하지만 아버지 스스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술만 마시며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결국 1년 뒤 다시 처벌받아 양강도 삼지연군 노동자로 쫓겨났다. 그래도 처음엔 잘 살았지만 점점 생활 형편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조 씨는 소년궁전을 다니며 악기를 배웠다. 외가 쪽에 음악하는 친척이 여럿인 것으로 보아, 음악적 재능은 유전인 듯싶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4년제 과정인 혜산혜술대학 피아노 전공반에 입학해 1997년 졸업했다. 이후엔 친척들 도움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 행정연출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은 그의 운명도 바꿔 놓았다. 예체능 전공자가 돈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은 북한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평양에 가 보니 잘 사는 집이 아니면 도저히 대학에 다닐 수 없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조 씨네 형편에서 대학 뒷바라지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는 1년 만에 자퇴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음악 전공자여서 그런지 군 기동선전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북한 기동예술선전대. 공사 현장이나 농촌에서 노래와 춤을 곁들여 정치 선전을 펼친다. 동아일보 DB

●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다

기동선전대 생활은 나쁘진 않았다. 사회 기강이 다 무너진 때라 일정한 액수의 돈만 선전대에 매달 바치면 출근을 강요하지 않았다. 물론 봄가을에 농촌에 가서 나팔을 불어 주고, 가끔 공사 현장에 가서 선전 활동을 하는 일은 해야 하지만 다른 곳보단 자유가 있었다.

조 씨는 점점 가난으로 빠져드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닥치는 대로 장사를 했다. 남들처럼 약초나 들쭉을 모아 중국에 팔았다. 한때는 통나무 장사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한동안 북한 당국은 백두산 지역 통나무를 중국에 팔아 밀가루로 바꿔 오는 것을 묵인했다. 이 나무를 ‘외화목’이라고 했다. 조 씨는 뇌물을 주고 호위사령부 경비구역에 들어가 나무를 사 왔다.

삼지연엔 김 씨 일가 별장이 있는데, 이를 경비하기 위해 무려 1개 여단, 9개 대대 병력이 주둔해 있다. 5000명 가까운 최정예 호위 병력이 추운 원시림에서 20대 청춘을 바치며 별장 외곽 경비를 서는 것이다.

군 관리 지역은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 나무를 벨 수가 없다. 하지만 호위 군인들도 사람인지라 배고픔을 견딜 수는 없는 법. 군관들에게 뇌물을 주면 병사들을 시켜 관내 통나무를 몰래 채벌하게 했는데, 조 씨는 이를 싣고 와 중국에 팔았다.

그런데 2007년 7월 ‘오문혁 사건’이 터졌다. 조선릉라888무역회사 함경북도 지부 외화벌이 책임자이던 오문혁이란 사람이 백두산 인근 함경북도 연사군에서 통나무 채벌을 허가받아 무역을 했는데, 중국에 판 통나무 중에 ‘구호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고 한다.

구호나무는 1940년을 전후해 빨치산들이 국내에 들어와 김 씨 일가를 찬양하는 구호를 썼다는 나무를 말한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사실은 노동당 선전부가 몰래 구호를 나무에 써놓고는 1980년대 말부터 갑자기 발견된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나무에 쓴 글씨가 오래된 것처럼 보이려면 특수 약품으로 글씨를 쓰고, 벗긴 나무 속살 색깔이 변할 때까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시약을 발라 글씨를 드러내야 한다.

공개된 구호나무야 유리관에 들어가 알 수 있지만, 은밀한 조작 단계에 있는 나무는 일반인이 알아보기 어려워 벌목 과정에 섞인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를 엄청난 사건으로 규정하고 오문혁 등 여럿을 공개 총살한 뒤 통나무 수출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 사건 불똥은 조 씨에게 튀었다. 산에 적잖게 쌓아둔 나무는 고스란히 그의 빚이 됐다. 호위부대 대원들이 그의 집에 와서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뺏어 갔다. 돈을 날렸다고 주저앉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장사를 해야 했다.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는 양강도 삼지연시 전경.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겨울에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지옥도가 펼쳐진다. 동아일보 DB

● 삼지연 아파트의 비밀

그때 양강도엔 전국에서 인력을 긁어모은 ‘618(육일팔) 돌격대’가 곳곳에 들어와 있었다. 김정일이 어느 해 6월 18일에 삼지연군을 잘 꾸리라고 지시했기에 붙은 이름이다.

김정은 시기에 삼지연 건설이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추진되던 일이었다. 삼지연 시내 낡은 집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2, 3층짜리 아파트를 지었다.

김정일은 삼지연에서 굴뚝을 완전히 없애라고 지시했다. 나무를 때지 않는 대신 전기로 난방과 취사를 보장한다는 것으로 이를 위해 혜산 인근에 삼수발전소를 건설했다.

삼수발전소는 벼락치기 공사 끝에 2006년 완공됐지만 북한 모든 공사가 그렇듯 제대로 가동될 리 없었다. 전기는 오지 않는데 구들은 이미 없앴으니 겨울에 삼지연 사람들은 얼어 죽게 생겼다.

급히 벽에 페치카(벽난로)를 만들어 붙이고 화목을 때기 시작했지만 한반도에서 제일 추운 삼지연에서 벽난로로 한겨울을 나기엔 역부족이었다. 봄이 오고 여름이 돌아오니 기한 내에 공사를 끝낸다며 대충 지은 벽에서 물이 줄줄 새고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붕은 중국에서 수입해 온 양철판을 붙였다. 위성사진으로 보면 알록달록 예쁜 마을처럼 보이지만 직접 가서 보면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조 씨가 통나무 다음으로 한 장사는 소고기와 한국 쌀을 바꾸는 장사였다. 삼지연 인근에는 평양에서 추방된 경제범들이 많이 사는 1만 정보 규모 감자농장이 있었다. 농장엔 소도 많았다.

북한에선 소가 죽으면 농장 관리위원장, 기사장, 축산지도원, 보위원이 확인 도장을 찍은 뒤 보안서 호안과(환경 및 교통 담당)에서 어디론가 싣고 가 처리한다. 그런데 관리가 숫자 맞추는 데 집중돼 있어 간부들이 짜고 조작할 여지가 충분하다. 가령 태어난 송아지를 신고하지 않고 있다가 늙은 소가 죽으면 이를 대체하는 것이다.

조 씨는 뇌물을 주고 늙은 소고기를 산 뒤 618 돌격대에 가져다 주고 받은 쌀을 팔았다. 618 돌격대는 당시 한국에서 들어온 40kg짜리 노란 포대에 담긴 쌀을 배급받았다. 돌도 없고 품질도 좋아 수요자가 많았다. 소고기를 팔고 산다는 것은 북한에선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일이지만, 당장 굶어 죽는 것보단 모험하는 것이 나았다.

조영남 씨가 지게차를 운전해 자신이 장만한 트럭에 물품을 싣고 있다.

● 6명을 잡은 ‘고려 보물’

그렇게 다시 일어서는 듯하다가 2010년 여름 큰 사기를 당하게 됐다. 누군가 황해도 사리원에 34kg이나 나가는 고려시대 돌거울이 있는데 엄청난 보물이라고 했다.

한 달 넘게 걸려 삼지연에 갖고 온 돌거울을 그가 직접 살펴봤다. 어둠 속에서 돌거울 뒤에 전짓불을 비추면 부처님 형상과 글씨가 앞에 나타나는 신기한 돌이었다. 골동품 조작 방법은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조작하기 힘든 유물이라고 판단했다.

돌거울 가격은 북한돈 130만 원. 당시 쌀 1.3t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중국과 골동품 거래를 한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70만 위안은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거의 100배 남기는 장사였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지불할 사람이 없어 조 씨 포함 4명이 돈을 모아 샀다. 전 재산을 들인 투자였다. 조선족 중개인을 안다는 사람과 길을 안내할 사람 등이 붙어 모두 7명이 돌거울 하나에 ‘대박’의 꿈을 걸었다. 서로를 믿을 수가 없으니 동시에 중국에 가서 팔자고 합의했다.

일행은 안내자를 따라 백두산 상류로 올라가 2m 높이 철조망을 가까스로 통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 도착하니 연길에 산다는 ‘성길’이라는 조선족이 부하 한 명을 데리고 마중 나와 있었다. 성길이라는 남성은 타고 온 승합차에 조 씨 일행을 태우고 어느 산속 오두막에 가더니 말했다.

“내가 직접 살펴보니 이건 진품이 맞는 것 같소. 내가 도시에 가지고 내려가서 감정받고 올 테니 승합차에 싣고 온 술과 음식을 먹으며 푹 쉬시오. 내 사람 한 명을 여기에 남겨둘 테니 의심할 필요는 없소.”

7명이 공안 초소를 지나 우르르 도시로 내려갈 순 없었다. 할 수 없이 일행은 30대 조선족과 오두막에 남았다.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중국 술과 기름진 음식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일행은 술을 마시고 조선족이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잠들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조 씨는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왔다. 나와 보니 오두막 앞은 온통 들쭉 천지였다. 북한에선 그렇게 따기 힘든 들쭉인데 중국에선 따는 사람이 없어 방치되고 있었다. 그는 페트병을 가져다 들쭉을 따서 담기 시작했다.

오두막에서 몇십 m쯤 벗어났는데, 갑자기 공안차 2대가 들이닥쳤다. 그가 정신없이 도망쳐 멀리서 지켜보니 잠을 자던 일행이 모두 끌려 나왔다. 한 명이 사라졌다고 한동안 주변을 수색하더니 포기하고 가 버렸다.

조 씨는 앞길이 막막했다. 산에 더 머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북한으로 돌아가자니 전 재산을 날리고 일행도 체포된 상황에서 막막했다.

‘이렇게 된 바엔 일자리라도 찾아 돈을 좀 벌어 가야겠다.’

2020년 조영남 씨가 쓰레기 소각장에서 로더를 운전하고 있다.

● 교회 회계원의 머슴

도로를 따라 산을 타고 이틀을 걸었더니 백두산 관광 관문 마을 이도백화가 나왔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할머니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하니, 저기 한국 목사가 있는 교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 보라고 했다.

교회에 가서 서성이는데 어떤 조선족이 나왔다. 교회에서 회계를 담당한다고 했다. 그는 조 씨를 식당에 데리고 가 밥을 사주며 이야기를 들었다. 산속에 자기가 관리하는 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머물며 일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차를 타고 따라나서니 숲속에 나무로 지은 집 4채가 있었다. 조선족은 한국 비구니들이 여름에 와서 휴양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집 세 채에는 각종 불교 관련 저서들로 가득했고 남은 한 채는 관리인 숙소였다. 소 7마리에 닭 수백 마리, 그리고 사냥개도 9마리 있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짐승들 사료를 끓여 먹이고 장작을 패고 불법 수렵에 나가는 조선족을 따라다니며 잡은 동물을 메고 오는 것이었다. 몇 달을 일했는데 돈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니 눈이 쌓여 도로가 없어졌다. 조선족은 겨울 관리를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사라졌다. 다행히 식량은 넉넉하게 있었다.

겨울 동안 그는 한국 비구니들이 남기고 갔다는 비디오테이프나 음악 테이프를 들으며 한국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중국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2011년 봄이 돌오자 조선족도 돌아왔다. 조선족에게 돈 벌어 집에 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공짜 머슴 일을 할 순 없다고 하니, 그도 미안했는지 인근 공사판을 소개해 주었다. 한족 수십 명과 어울려 일했다. 일당은 80위안이었다.

안투현의 한 마을에서 수해로 망가진 제방을 복구했다. 그 마을에 젊은이는 없었다. 다 한국에 갔다고 했다. 조 씨는 쉬는 날에도 쉬지 않고 마을 노인들 일손을 도왔다. 그렇게 쌓은 인맥이 1년 뒤 그를 살릴 줄은 몰랐다.

7개월이 지났을 때 사고가 터졌다. 그가 북한에서 온 것을 알고 계속 괴롭히던 한족 일꾼과 참고 참던 끝에 싸움을 벌였는데, 공안에 신고당한 것이다. 급히 도망쳤지만 수중엔 2400위안밖에 없었다. 받을 돈이 4000위안 있었지만 도망자에게 돈을 줄 리도 만무했다.

2400위안을 품고 그는 북한으로 향했다. 한번 넘어온 기억을 되살려 철조망을 몰래 넘어 북한에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백두산 인근까진 경비가 삼엄하진 않았다. 물론 지금은 전기 철조망까지 설치돼 탈북이 불가능해졌다.

며칠을 걸어 집에 오니 남이 살고 있었다. 아들이 떠난 뒤 생활이 더 궁핍해진 부모는 집을 팔고 돌격대가 버리고 간 토굴에서 살고 있었다.

어둠을 틈타 토굴에 들어갔다. 폐인이 된 아버지가 “당장 보위부에 같이 가서 자수하자”고 야단을 쳤다. 어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품속에서 중국 돈을 꺼내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는 1년 반 뒤 세상을 떠났다.

숨어 살면서 돌거울을 들고 함께 떠난 사람들 소식을 수소문했다. 이미 북송돼 처벌받았다는 것이었다. 한 명은 13년형을 선고받았다. 북한 감옥에서 13년 복역한다는 것은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된 일부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너는 중국에서 1년을 숨어 살기까지 했으니 더욱 중형이 나올 것이다. 더 살 수 없으니 중국에 도망가서 사는 방법밖에 없다.”

이때 이웃 형이 “내가 얼마 뒤에 중국에 갈 건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떠난 길이 죽음의 길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한국에 와서 소원이던 자신의 트럭을 장만했지만 결국 많은 빚만 남았다. 수지 가루 포대를 실은 조영남 씨의 7.5t 트럭. 이 트럼은 할부금을 내지 못해 결국 캐피털사에 넘어갔다.

● 아들이 태어나다

얼어 죽을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조 씨는 7개월 일한 동네 촌장 집으로 찾아갔다. 촌장의 셋째 아들은 한국에 일하러 갔는데, 탈북민인 그의 부인도 함께였다. 그의 소개로 연길의 브로커를 알게 됐다.

촌장은 그가 떠날 때 고이 간직했던 산삼 한 뿌리를 꺼내주며 “연길의 어느 집에 가서 팔아서 여비로 쓰라”고 했다. 산삼을 갖고 가니 1만 위안이라는 거액을 주었다. 백두산 아래엔 그렇게 악마도 천사도 살고 있었다.

2012년 여름 그는 연길에서 다른 탈북민 6명과 함께 한국으로 출발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중국을 횡단해 동남아 국가로 넘어가 수개월 감옥 생활을 하고 한국에 들어온 때가 2012년 12월 25일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이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조사와 하나원 과정을 마치고 2013년 5월 인천의 한 임대주택에 짐을 풀었다. 인천을 정착지로 선정한 이유는 공단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중국에서 공사판 막일을 어느 정도 하다 보니 기계를 다루고 용접하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또 차를 운전해 보고 싶은 소원을 쉽게 이룰 수 있는 곳이 공단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에서 운전사는 벌이가 꽤 좋은 선망의 직업이었다.

한국 생활 시작은 행복했다. 일한 것만큼 돈을 벌 수 있었다. 운전하고 싶은 소원도 풀었다. 처음 취직한 박스 제조업체에서 1t 화물차를 몰고 납품 다니는 일을 맡았다. 3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았더니 3000만 원이 넘게 생겼다. 한국 사회도 어느 정도 알고 자신감도 생겼다. 이때부터 주변의 유혹이 그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평생 월급도 적은 중소기업에서 계속 일하겠느냐.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 돈을 더 버는 길이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가게를 열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2년 동안 버티다가 빚만 지고 나앉았다. 젊은 나이면 인생 수업 대가였다고 생각할 법하겠지만 어느덧 그는 42세였다. 그럴듯한 직업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안해 본 일이 없다. 택배 기사나 대리기사는 기본이고 용접과 위험물 관리도 했고 중장비도 몰았으며, 밧줄을 타고 고층 건물에 매달려 페인트칠도 했다. 올해 2월 암 진단을 받을 때까지 투잡, 쓰리잡을 뛰며 빚을 갚았다. 빚을 갚고 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탈북민 출신 여섯 살 연하 애인도 만났다.

하지만 행복은 왜 그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것일까. 미래의 꿈은 잠시 곁에 머물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애인에게 불행이 닥쳐 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진 뒤 몇 달 뒤 북에 있는 애인 집에서 어머니가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좀 있다가는 큰언니가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둘째 언니까지…. 코로나19 봉쇄 때문에 단 3개월 만에 애인의 가족 4명이 죽었다.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다른 비보가 잇달으니 조 씨가 북한 브로커에게 “제발 이런 소식을 그만 알려 달라”고 사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후에 누가 더 죽었는지 알 수는 없다.

애인은 충격을 받을 때마다 딴사람으로 변했다. 한때는 방송에도 출연한 활발한 성격의 여인이 말을 잃고 눈빛을 잃었다. 삶을 포기하고 매일매일 울며 술만 마시며 보냈다. 이 와중에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어쩌면 조 씨에겐 유일한 아이일지도 모른다.

조 씨는 애인을 치료하려고 애썼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이듬해 봄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를 애엄마에게 맡기고 그는 돈을 벌려고 나서야 했다. 하지만 엄마는 애 돌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풀이만 해댔다.

아들이라도 살려야 했다. 결국 조 씨는 8개월 만에 아들을 안고 집을 나왔다. 물론 애인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때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애엄마는 극심한 대인공포증에 시달려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담당 형사도 접근이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조 씨밖에 없다.

조영남 씨가 몇 년 전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간병하고 있다. 아이가 병원에 입원하면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조 씨가 일을 쉬고 간병한다.

● 쓰러질 수 없는 삶

조 씨는 일하면서 아들을 키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찾은 방법은 트럭 운전이었다. 아들을 운전석 옆에 태우고 다니며 분유를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그는 전액 할부로 6800만 원짜리 7.5t 중고 트럭을 샀다.

이때부터 거의 차에서 먹고 살았다. 하루에 2~3시간만 자고 운전했다. 식당 갈 돈이 없어 하루 컵라면 하나로 때울 때도 많았다. 그 라면조차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에서 유통기간이 지난 것을 사 왔다. 물 한 병 살 돈도 없었다. 평일 위탁가정에 아이를 맡기면 180만 원이나 지급해야 하는데, 그만한 돈은 없었다. 16㎡(약 5평) 원룸인 월세방에 가면 아이가 운다고 이웃들 항의가 빗발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다.

궁지에 몰린 중요한 원인은 중고 트럭이 걸핏하면 고장 났기 때문이다. 3년 동안의 정비일지를 보면 4500만 원이 수리비로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할부금을 다 갚기 전에는 차를 팔 수도 없다.

운전과 함께 보험설계사 일도 시작했다. 차가 수리에 들어가거나 일감을 받지 못하면 보험 계약을 따내러 나갔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남자가 포대기에 싼 아이를 안고 나타나면 고객들이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2024년 1월 1일은 잊지 못할 하루였다. 설날엔 쿠팡 택배 배송 단가가 높아진다. 대전에서 울산까지 가는 식품 배송을 맡았다. 아이에게 소시지 하나를 먹이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차가 고장이 나서 도로에서 9시간이나 보내야 했다.

배송은 마무리해야 하니 견인차를 불렀는데 비용이 270만 원 나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식품 배송 지연에 따른 연체료로 2000만 원 넘는 벌금이 날아왔다. 치명타였다. 개인회생을 신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트럭도 캐피탈사로 넘어갔고 추가로 50만 원씩 60개월을 갚아야 한다.

계속 이어지는 고난으로 건강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더 피곤해지고 힘이 없어져 지난해 12월 병원에 갔더니 간암 2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를 받았다. 극한의 스트레스가 누적돼 발생한 병이었다. 올해 2월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는 장담할 수 없다.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암 치료비까지 감당해야 하는 데다 애엄마도 버려둘 수 없어 생활비를 보태 줘야 하니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질 수가 없다. 수술받은 뒤 보험설계사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항암 투병하며 육체노동은 무리였다. 너무나 힘들지만 그는 쓰러질 수가 없다. 지금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제가 쓰러지면 아들을 키울 사람이 없어요. 매일 아침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아버지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빕니다.”

언론은 성공한 탈북민 위주로 기사를 내보낸다. 그러나 한국에 온 탈북민 3만5000여 명 중에는 조 씨처럼 여전히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버거운 삶의 무게를 안간힘 쓰며 버텨 내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는 사람들. 아버지라는 이름을 지켜 내기 위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조 씨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의 고향 백두산에선 만병초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