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놓아준 엄마, 5분 뒤 달라진 지하철 풍경… 음악극 ‘섬’

박성준 2026. 11. 7.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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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한산했던 지하철 객차 통로가 열 살짜리 발달장애 아이에게는 활주로처럼 보였나 보다.

'격리'나 '소외'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내기 어려운 학대와 인권유린을 겪었던 한센인들의 슬픈 과거와 오늘날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고통을 씨줄과 날줄 삼아 엮어낸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고지선의 가족이 그 하나다.

한센인들을 회색 머플러로, 발달장애 아이를 노란 모자로 표현한 연출도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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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한산했던 지하철 객차 통로가 열 살짜리 발달장애 아이에게는 활주로처럼 보였나 보다. 지원이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태세였고 엄마 고지선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아, 내가 이 아이를 놔줘야 하나, 붙잡고 있어야 하나.’ 억지로 붙잡으면 벌어질 일이 눈에 선했다. 고민 끝에 엄마는 아이를 놓아주기로 한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달린다. 언제든 돌발행동이 일어나면 자신이 나서겠다는 것을 다른 승객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주면서.

“열 살짜리 발달장애인이 어떤 소리를 내고 어떻게 달리는지 본 적 있으세요? 지원이는 절대로 일자로 뛰지 않습니다. 머리를 흔들면서 갈지자로 뜁니다. 아갸갸갸! 하는 소리를 내면서 뜁니다. 기분이 너무 좋다는 얘기예요!”

음악극 ‘섬: 1933~2019’의 한 장면. 시대를 달리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차별과 소외, 공존의 의미를 묻는다.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지원이를 상징하는 노란 모자가 객차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달리자 승객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흠칫 놀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5분쯤에 걸쳐 변화가 일어난다. 승객들이 다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저마다 하던 일을 계속한다. 낯설었던 아이와 함께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찾아낸 것이다.

“사람들은요. 익숙해지면 더는 시선을 주지 않아요.”

음악극 ‘섬: 1933~2019’에서 기억에 남는 여러 장면 중 하나다. ‘격리’나 ‘소외’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내기 어려운 학대와 인권유린을 겪었던 한센인들의 슬픈 과거와 오늘날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고통을 씨줄과 날줄 삼아 엮어낸다.

무대는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이 소록도에서 40여 년간 한센인들을 돌본 실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헌신을 기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들이 만났던 한센인들의 비참한 삶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들의 고통에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러한 섬이 오늘날에도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고지선의 가족이 그 하나다. 식당이든 극장이든 화장실이든 어디를 가든 힐끔대고 피하는 시선에 지친 장애인 가족들이 결국 제 발로 들어가는 섬이다. 

작품에는 세 개의 시간이 흐른다. 1933년 일제강점기 소록도로 강제 이주된 한센인 백수선의 삶, 1966년부터 소록도에서 환자들을 돌본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 2019년 서울에서 발달장애 아들 지원이를 키우는 고지선의 삶이다. 시대도 사연도 다르지만 그들을 고립시킨 사회의 편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품은 세 시대를 끊임없이 오가면서도 극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간대가 교차하면 자칫 혼란을 주거나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뜨리기 쉽지만 ‘섬’은 인물들의 감정과 장면을 촘촘하게 연결하며 이를 자연스럽게 극복한다. 한센인들을 회색 머플러로, 발달장애 아이를 노란 모자로 표현한 연출도 섬세하다.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자극적으로 재현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겪는 현실은 선명하게 드러낸다. 낡은 나무판자로 이어진 무대와 짙푸른 조명, 어둠 속에 떠오르는 둥근 달도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다만 한센인 백수선의 후손이 고지선으로 이어지는 극중 설정은 아쉽다. 사전에 알지 못하면 두 인물의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여성을 혈연으로 연결하지 않아도 작품이 말하려는 차별과 소외의 역사는 충분히 맞닿아 있다. 

묵직한 사회적 주제를 공감과 감동으로 끌어올리는 힘은 서정적 음악에서 나온다. 한센인들의 비극을 노래하는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몰라서 3년, 알고서 3년, 썩어서 3년”이라는 처절한 가사를 담은 ‘세 번 죽는다’ 등이 심장을 울리고 때로는 통곡하고 싶게 만든다. 비참한 역사를 다룬 노래와 평범한 일상의 온기를 담은 노래가 대비를 이룬다.

배우들 호흡도 좋다.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그린 ‘태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을 다룬 ‘백인당(百人堂) 태영’까지 ‘목소리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장우성 작가·이선영 작곡가·박소영 연출가와 세 작품에 모두 출연한 백은혜 등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팀워크가 무대 곳곳에서 느껴진다. 2019년 초연, 2024년 재연을 거쳐 세 번째 시즌을 맞은 작품이 공연 때마다 호평받은 이유 중 하나다.

극의 마지막은 특수학교 설립을 놓고 벌어진 주민들의 찬반 토론 장면이다. 2017년 서울 강서구에선 장애학생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학교 설립을 호소했는데 어찌 됐을까. 확인해보니 서진학교는 2020년 3월 개교했다. 지난해 8월 서울 성동구에선 또 다른 특수학교 설립안을 두고 장애학생 부모들은 서울시의회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특수교육 수요는 계속 늘고 있다. 올해 전국 특수교육대상자는 12만4195명으로 4년 전보다 2만500명 증가했다. 지하철에선 5분이면 가능했는데 장애인 가족들이 더는 세상의 시선을 피해 ‘장애도’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날은 언제쯤 올까. 국립정동극장에서 11월 22일까지.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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