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원치 않는다"는 말, 살려달라는 비명이었다… '반의사 불벌'만 없애면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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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스토킹은 이미 2023년 법 개정으로 '반의사불벌' 조항 적용을 받지 않는 범죄(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재판에 넘길 수 없는 범죄)라는 점입니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국감에서 가정폭력처벌법상 반의사불벌 폐지에 적극 찬성한다고 밝혔고, 김동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반의사불벌 폐지를 담은 '교제폭력처벌강화 2법' 발의를 예고했죠.
경찰청범죄통계에 따르면 반의사불벌 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2023년 스토킹 사범 불송치 사유의 42.5%는 '처벌불원에 따른 공소권 없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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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은 반의사불벌 조항 없앤 지 3년
현장선 여전히 '처벌불원'으로 사건종결
"흉기·목조름·가족 위협은 특히 고위험"
피해자 의사보다 가해자 위험성 위주로 봐야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지난달 12일 새벽 제주시 연동의 한 호텔 앞에서 40대 여성 A씨가 전 연인인 강성은(61)에게 살해됐습니다. 피해 여성인 A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스토킹과 성폭력, 교제폭력으로 강성은을 네 차례나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러나 모두 정식 사건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종결됐습니다. A씨가 사건 접수를 거부하거나 조사에 나오지 않았고,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는 이유였죠.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스토킹은 이미 2023년 법 개정으로 '반의사불벌' 조항 적용을 받지 않는 범죄(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재판에 넘길 수 없는 범죄)라는 점입니다. 법에서 이미 사라진 조건이 현장에선 여전히 사건을 종결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로 쓰인 셈이죠.
여성들이 관계성 범죄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줄줄이 이어지자, 지난달 국회 성평등가족위원회 국감에서는 교제폭력과 가정폭력에서도 반의사불벌 조항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습니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국감에서 가정폭력처벌법상 반의사불벌 폐지에 적극 찬성한다고 밝혔고, 김동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반의사불벌 폐지를 담은 '교제폭력처벌강화 2법' 발의를 예고했죠. 폐지는 사실상 '합의된 전제'가 돼 가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당장 법조문 하나가 사라진다 해서, 수사 현장의 관행까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법조문은 사라졌는데… '공소권 없음'이 '혐의 없음'으로 바뀌었을 뿐
숫자부터 볼까요. 경찰청범죄통계에 따르면 반의사불벌 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2023년 스토킹 사범 불송치 사유의 42.5%는 '처벌불원에 따른 공소권 없음'이었습니다. 조항이 사라진 이듬해 이 비율은 2.7%로 뚝 떨어졌지만, 그만큼 '혐의 없음'이 늘어 불송치의 96.3%를 차지했어요. 한민경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난해 10월 여성신문 칼럼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지적하며 "반의사불벌죄 규정 삭제라는 법 개정과 별개로 유지되는 일종의 '사건 처리 관행'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짚었습니다.
이런 관행은 뿌리가 깊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18년 '경찰의 가정폭력 사건 대응 실태와 개선 방안' 보고서에서 '반의사불벌죄가 아닌 가정폭력 범죄마저도 사실상 반의사불벌죄와 마찬가지로 다뤄진다'고 지적했어요. 보고서를 쓴 김정혜 연구위원은 "사건을 형사처벌하는 대신 가정법원으로 보내는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할 때, 피해자 처벌 의사를 묻도록 한 조항이 (가해자를 보호하는) 일종의 방패로 기능하기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관계성 범죄를 '개인사'의 문제로 치부하는 시선이 깔려 있다는 뜻인데요. 반의사불벌 조항이 있든 없든 수사 현장에선 "처벌을 원하세요?"라는 질문 하나가 사건의 향방을 갈라온 셈입니다.
피해자가 말하는 '처벌불원' 뒤엔 보복의 공포가 있다
그렇다면 관계성 범죄의 피해자들은 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할까요. 올해 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발표한 '관계성 범죄 위험성 평가 연구'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연구진이 심층면접한 현장 경찰들은 피해자가 말하는 처벌불원 의사 이면에 '가해자가 언제 나에게 보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석했어요. 당장 수사를 멈추지 않으면 가해자가 자신의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는 거죠.

피해자들은 신고와 처벌이 자신의 안전을 해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피해자의 말은 "나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가 아니라 "여기서 더 수사를 진행하면 내 목숨이 더 위험해질까 두렵다"는 신호라는 거죠. 그 말을 종결 사유로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위험한 피해자부터 보호망 밖으로 밀려나게 되겠죠.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 묻기 전에, 가해자의 위험성 판단할 잣대 새로 세워야

그렇다면 반의사불벌 폐지 이후엔 무엇을 논의해야 할까요. 출발점은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를 묻는 대신, 가해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판단할 잣대를 새로 짜는 일입니다.
'관계성 범죄 위험성 평가 연구' 보고서를 쓴 박성훈 연구위원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가해자 위험성을 평가할 때 △범행 중 흉기 사용 △목조름 △피해자 가족에 대한 위협이 발생한 경우, '고위험 지표'로 판단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아울러 "가해자가 잠정조치 등 법적 제재를 받고도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보복 범죄 가능성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어요. 신고 데이터를 볼 땐 단순히 횟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고 주기가 얼마나 짧아지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도 제안했죠.
지난달 국감에서도 같은 지적이 나왔어요. 박지혜 민주당 의원은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힌 뒤 같은 가해자를 다시 신고한다면 즉시 '고위험군'으로 다뤄야 한다고 봤습니다. 피해자의 진술보다 가해자가 쌓아온 이력에 무게를 두자는 얘기죠.
반의사불벌 폐지는 처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짐을 피해자에게서 덜어주는 일입니다. 하지만 법조문과는 별개로 여전히 남아 있는 기존의 관행을 제때 청산하지 못하면 비극은 되풀이될지 모릅니다.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피해자의 말을 이제는 '위험을 알리는 신호'로 읽어야 할 때입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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