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과 국수
[박준의 마음쓰기] (51)

누르스름한 표지에 그려진 시인의 아스라한 얼굴, 백석(白石)이었다. 어느 문예지를 정기 구독하면 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는데 그때 내가 고른 게 백석 시 전집이었다. 한 편을 읽는 데 많은 공과 시간이 들었다. 낯선 평안북도 방언과 한자 탓에 사전과 옥편을 번갈아 찾아가며 발굴하듯 읽었다. 곧 절반도 못 읽고 책을 덮었다.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좋아서였다. 더 깊이 빠져들어 백석을 사랑하게 되면 나의 시를 쓰지 못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백석의 시를 똑바로 보지 못한다. 닮고 싶은 구석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은 정수라 할 수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잘 배우고 익혀야 하지만 언젠가는 익숙한 배움의 세계를 훌쩍 떠나야 한다. 안온함에 기대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아류나 표절 소리를 듣게 된다. 예를 들자면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은 큰형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안 살래” 하고 집을 뛰쳐나간 둘째 형이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만큼은 더 빛나는 인재일 것이다.
백석은 가히 시인들의 시인이다. 시단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과 작품에 대한 설문조사를 종종 벌일 때마다 백석은 매번 첫손에 꼽힌다. 한때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백석을 읽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던 1988년 월북 작가들의 작품 출판이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여기에는 시인이자 국어학자였던 당시 정한모 문화공보부 장관의 노력이 있었다. 정 장관은 문학사의 단절을 극복하고 문학적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해금 조치를 단행한다고 밝혔다. 백석을 비롯해 정지용·임화·이태준·박태원·이용악·오장환 등이 포함됐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8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로 등단한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기자로 일한다. 이후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에 나서 첫 시집 ‘사슴’을 간행한다. 해방 이후 귀향한 백석은 분단 직후까지 번역과 아동문학 창작에 몰두한다. 그리 오래가지 않아 백석은 추방된다.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의 축산반에 배치돼 양 치는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삼수군은 개마고원 북쪽의 고원 지대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62년 시인으로서 마지막 작품을 발표하고 이후 19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한다. 서정 시인이자 모던보이 백석에게 이 시간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얼마나 괴롭고 치욕적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김연수 소설가의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이나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을 통해 아련하게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동네에 좋아하는 국숫집이 있다. 새벽부터 큰 솥을 내걸고 멸치 육수를 긴 시간 정성스럽게 끓이는 곳이다. 식당 벽면 한쪽에는 백석의 시 ‘국수’도 걸려 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사실 평안북도가 고향인 백석의 국수와 우리의 국수는 다르다. 우리가 지금 평양냉면이라 부르는 음식이 평안북도에서는 국수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국숫집 사장님께 굳이 꼬집어 알려 드리지 않았다. 국수든 냉면이든 반가운 것은 분명하니까. 돌이켜 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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