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나를 끊어놓던 기호 ‘하이픈’(‘-’)… 이젠 韓·美 잇는 춤의 상징”[M 인터뷰]

박세영 기자 2026. 11. 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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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하이픈(-)은 저를 끊어놓는 기호였습니다. 지금은 한국과 미국을 잇는 기호입니다."

한국계 미국인 4세 안무가 다나 타이 순 버제스(58)가 말하는 자신의 자리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사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그를 가라테 도장에 보냈다.

샌타페이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한국계 미국인이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놓던 그는 "지금은 저와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다"면서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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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첫 내한공연 美한인4세 안무가 다나 타이 순 버제스
1903년 하와이 첫 이민자 후손
이번 무대 올린 ‘리빙 부산’에
외조부모 결혼사진 영사하기도
아시아계 드문 샌타페이서 자라
어려서 가라테 무술 8년 익히다
16세에 무용 접하고 인생 걸어
아시아계로 사는 방식 보여주려
1992년 댄스 컴퍼니 직접 창단
2013년엔 백악관서 공연하기도
미국의 한인 4세 안무가 다나 타이 순 버제스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 내 회의실에서 문화일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지어 보이고 있다. 그는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자랑스럽고 놀라운 나라”라고 감탄했다. 문호남 기자

“어릴 때 하이픈(-)은 저를 끊어놓는 기호였습니다. 지금은 한국과 미국을 잇는 기호입니다.”

한국계 미국인 4세 안무가 다나 타이 순 버제스(58)가 말하는 자신의 자리다. 1992년 워싱턴DC에서 창단한 다나 타이 순 버제스 댄스 컴퍼니를 이끌고 34번째 시즌을 맞은 버제스를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회의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달 30∼31일 서울무용창작센터에서 창단 이후 첫 내한공연을 했다.

◇1903년 갤릭호에서 시작된 ‘한인 미국 이민사’의 주인공

그의 가족사는 한인 미주 이민의 첫 장에서 시작된다. 외증조부 채진형은 1903년 첫 이민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오아후에 닿았다. 또 다른 외증조부 강만수는 이듬해 맨추리아호로 건너왔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온 아이가 버제스의 외조부다. 한인 가족이 몇 되지 않아 서로를 모두 알고 지냈고, 두 집안의 자녀가 결혼했다.

외조부가 아이 때 받은 1904년 여권은 스미스소니언에 있다. 이 가족의 기록이 초기 한인 이민 가정을 대표하는 사례로 그곳에 보관돼 있다.

한국에 올 때마다 그 시간을 되짚는다고 했다. “저는 1903년과 1904년, 그 이전의 기억과 이야기를 담은 타임캡슐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오면 그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찾아보게 됩니다. 4세대이지만 피에 흐르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은 델몬트 파인애플·사탕수수 농장에서 3대에 걸쳐 일했다. 올해 97세인 그의 모친 애나 강 버제스도 그 농장에서 자라며 일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주는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떠날 때는 곧 돌아올 생각이었다. “한국이 끊기면서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돕던 사람들 가운데 제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의 독립을 바랐던 겁니다.”

농장에서는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영어가 섞인 피진어를 썼다. 어머니는 한국어를 알아듣기는 해도 그에게 한국어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집은 한국식이어서 김치찌개와 불고기를 먹고 자랐다.

“말을 잃어도 마음은 한국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통하는 법으로 배운 것이 예술이었습니다.”

이번 무대에 오른 ‘리빙 부산(Leaving Pusan)’은 케네디센터와 스미스소니언이 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위촉한 2002년 작 ‘트레이싱스(Tracings)’의 첫 장이다. 막이 오르자 외조부모의 결혼사진이 무대에 영사됐다. “두 분이 그 자리에 계시기를, 다시 고향에 오시기를 바랐습니다.” 이번에 무대에 올리는 일곱 편 가운데 하나만 꼽아 달라고 하자 그는 이 작품을 골랐다. “집이라 부를 곳을 찾는 여정은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한국인이든 한국계 미국인이든, 어디에 있든 우리는 모두 집이라 부를 곳과 자기 사람들을 찾습니다.”

다나 타이 순 버제스 댄스 컴퍼니(DTSBDC)가 지난달 30∼31일 서울 은평구 서울무용창작센터에서 ‘만다라’(위 사진부터), 신작인 ‘라이트 어게인스트 디 어스’, 그리고 백남준의 미디어아트와 함께 올린 ‘하이픈’을 공연하는 모습. DTSBDC 제공

◇가라테에서 발레로

한국계 어머니는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출발해 지금은 화가이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인 아버지도 화가였다. 두 사람은 1950년대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에서 만났다. 그가 자란 뉴멕시코주 샌타페이는 아시아계가 거의 없는 동네였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사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그를 가라테 도장에 보냈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8년을 다녔고, 도장은 안전한 공동체가 됐다. 주 종목은 정해진 동작을 익혀 연기하는 ‘가타’였다. “매일 몸을 훈련하고 새 동작을 배워 무대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용과 같았습니다.”

열여섯 살 무렵 아버지가 친구와 함께 무용 수업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발레 수업이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가라테에는 움직임은 있어도 창작이 없었으니까요.” 다음에 들어간 현대무용 수업에서 평생을 걸기로 정했다.

부모의 작업실은 그의 창작 방식에 녹아들었다. “저는 무대를 캔버스로 봅니다. 무용수는 붓질이고, 그들이 무대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며 그림을 그립니다.”

1992년 무용수 친구들과 무용단을 만들었다. “함께 공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하는 작품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보여줄 무대가 필요했습니다.”

아시아계 무용단이 없던 시절, 초창기가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된다. 그는 솔로 공연에 쓰이는 소품을 직접 들고 다니던 20대를 회상했다. “공연할 때마다 50∼100파운드(약 23∼45㎏)짜리 돌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 돌을 안고 버스에 오르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스미스소니언이 그를 위해 최초의 상주 안무가 자리를 만들었고, 케네디센터 시즌 무대에 올랐다. 언젠가는 공연이 끝난 뒤에 국무부 관계자가 분장실로 찾아와 미국을 대표해 투어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2013년에는 백악관에서 공연하고 작가 에이미 탠 등과 함께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다시 위기가 왔다. 무대에 설 수 없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7시까지 글을 썼고, 그렇게 회고록 ‘치노 앤드 더 댄스 오브 더 버터플라이’가 나왔다.

◇“이제 내게 하이픈은 연결”

샌타페이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한국계 미국인이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놓던 그는 “지금은 저와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다”면서 활짝 웃었다. 이번 무대에 오른 ‘하이픈(Hyphen)’에는 백남준이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초 사이에 만든 영상이 함께 쓰였다. 그는 이 작품을 고른 이유에 대해 “한 젊은이가 자기 정체성을 묻고 있다고 느꼈다”면서 “저에게는 자화상에 가까운 영상”이라고 말했다.

젊은 안무가에게 할 말을 묻자 그는 “남의 작품을 닮은 작품으로 이름을 얻은 안무가는 없다”고 했다. “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이야기가 무엇인지, 내가 움직이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그는 서울에 온 뒤 단원들과 경복궁을 돌아봤다. “궁을 보고, 한편으로는 그 옆에 있는 첨단 건물들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한 블록 안에 전통과 경제적 성취가 함께 있습니다. 이런 회복력을 가진 나라를 달리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의 나라에 작품을 들고 온 버제스는 “조상들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감격스러워했다.

박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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