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광주 정원 재발견]⑭ 구례 천 개의 향나무 숲: 숲이 건네는 온전한 안식, 세월이 빚은 쉼터

박정석 기자 2026. 11. 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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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장서 농지로…1천여 수목이 들려주는 초록빛 서사
자연이 조각한 하트 모양 은목서·향나무 터널 일품
멍석·늘보정원 등 주제 따라 깃든 가족 추억과 여유
평탄한 숲길 따라 반려견과 거니는 사색의 공간
단순 풍광 소비 넘어 성숙한 관람 문화·상생 희망
정원의 시그니처인 은목서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여유로운 차 한 잔을 즐기는 방문객들. /정원주 제공
정원은 한 사람의 삶과 철학, 그리고 세월의 궤적이 정직하게 투영되는 거대한 자서전이다. 남도일보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공동기획 '전남광주 정원 재발견' 열네 번째 순서로 찾아간 곳은 전남광주 구례군 광의면에 위치한 '천 개의 향나무 숲'이다. 1천여 그루의 향나무와 수목이 안식처를 이루는 이곳은 정원주 안재명(56) 씨가 15년 전 묘목장 터를 매입해 자연의 시간에 맞춰 한땀 한땀 가꿔낸 무위(無爲)의 공간이다.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숲이 전하는 온전한 안식과 힐링을 만나본다.
하늘에서 바라본 정원 전경. 푸른 수목과 화사하게 피어난 홍매화가 봄의 색채를 더해 그림같은 풍광을 완성한다. /정원주 제공

◇백사장서 틔운 숲, 100년 수목의 터전

구례군 광의면 천변길. 지리산 자락의 기운을 머금은 하천변을 따라 정원으로 들어서면 1만 8천547㎡(약 5천600평) 규모의 드넓은 초록빛 안식처가 눈앞에 펼쳐진다. 2020년 4월 전라남도 제14호 민간정원으로 지정된 '천 개의 향나무 숲'이다. 이름 그대로 1천여 그루가 넘는 향나무와 각종 수목이 빽빽하게 어우러진 이곳은 들어서는 순간 세상의 소음과 단절된 듯한 고즈넉함을 선사한다. 정원 전체가 턱이나 경사 없이 평탄해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부터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 반려견과 함께한 방문객까지 누구나 편안하게 자연에 침잠할 수 있다.

정원이 터를 잡은 부지는 본래 옛 하천의 백사장이었던 곳으로, 모래와 자갈이 오랫동안 쌓인 후 도로와 둑이 생기면서 농지로 변모했다. 수분을 머금는 보습력과 물이 잘 빠지는 배수성을 동시에 갖춘 토양 환경 덕에, 수십 년 전 묘목장 시절에 심겼던 나무들이 저마다 웅장한 수형을 자랑하며 자라났다. 안 대표가 15년 전 이 땅을 매입해 사재와 정성을 쏟아붓기 시작했을 때, 이미 땅속에는 세월이 빚어낸 거대한 숲의 씨앗이 내재돼 있었던 셈이다.
'천 개의 향나무 숲'의 시그니처인 열 그루의 은목서 군락. 전지 작업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수형이 인상적이다. /빅정석 기자

◇전지 없이 일조량이 만든 자연의 기적

정원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이 정원의 시그니처인 열 그루의 은목서 군락이다. 우뚝 솟은 봉오리가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하트 형상을 띠고 있는 이 군락은 인공 전지를 단 한 차례도 거치지 않은 자연의 작품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일조량의 궤적과 햇빛을 더 받기 위해 스스로 키를 키운 자생적 경쟁이 어우러져, 여러 그루의 나무가 마치 한 그루의 거목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70~100년 수령의 향나무들이 녹색 터널을 형성한 '사색의 길'. 맥문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방문객들에게 한적한 평온함을 건넨다. /박정석 기자
이 은목서 군락을 지나 정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수령 70~100년에 이르는 향나무들이 양쪽으로 길게 터널을 이룬 '사색의 길'이 반겨준다. 토종 향나무를 비롯해 가이스카 향나무, 서양 향나무 등 다채로운 수종이 자아내는 숲터널은 마치 유럽의 아늑한 공원을 떠올리게 하는 고즈넉함을 선사한다.
커다란 바위에 앉아 정원의 탁 트인 수목 풍경에 몰입할 수 있는 '멍석정원'. 순간의 멍 때림이 온전한 비움의 휴식을 선사한다. /박정석 기자

◇15년 정성의 궤적, 삶의 가치를 되찾다

안 대표가 묘목장에 불과했던 이곳을 개인이 머무는 농장에서 누구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민간정원으로 개방하게 된 과정에는 그의 삶의 궤적이 짙게 투영돼 있다. 구례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낸 뒤 외지에서 생활하던 그는 30대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25년여간 상업에 종사했다. 물질적 성취를 목표로 달렸던 젊은 시절을 지나 사업적 기반을 잡았을 무렵, 그는 인생의 에너지를 온전히 쏟을 가치 있는 일을 찾던 중 이 정원 부지를 마주했다.

개인 농장으로 시작했던 공간은 매년 투입되는 관리비와 노동력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지속 가능한 운영 구조를 고민하게 됐고, 이는 곧 대중에게 문을 열고 차 한 잔의 여유를 나누는 공공재적 가치를 지닌 민간정원으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정원은 정원주의 삶과 심성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그의 말처럼, 인공적인 조형을 배제하고 지나온 세월을 오롯이 담아낸 정원의 모습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까지 엿볼 수 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나무 아래 잔디밭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방문객들. /정원주 제공

◇추억이 건넨 이름, 숲속에 깃든 오두막 쉼터

이곳 정원에는 가족의 서사도 훈훈하게 녹아있다. 젊은 시절 자녀들과 1t 트럭을 타고 여행을 다녔던 기억은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시절 아이들이 이곳 정원 부지에서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일을 돕고, 흙놀이를 하다가 고랑에서 잠들곤 했던 추억은 정원 곳곳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나무의 결이 살아있는 오두막 내부. 아늑한 자리에 앉아 창 밖에 펼쳐진 조용한 들녘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 좋다. /박정석 기자
나무 위에서 조용히 졸며 쉬고 싶다는 막내딸과의 대화에서 착안한 '늘보정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쉼을 즐기는 여유의 장소가 됐다. 수령 100년이 넘은 감나무 세 그루가 다채로운 색감의 변화를 보여주는 '오색정원', 웅장한 수목 풍경이 보이는 바위에 앉아 잡념을 비워내는 '멍석정원', 장미와 허브를 심어 향긋함을 더하고자 했던 '향기정원' 등은 가족의 온기가 돋보이는 공간들이다.
기와 지붕과 묵직한 나무 기둥, 벽돌이 어우러진 쉼터 '깨솔솔 오두막'. /박정석 기자
특히 정원 산책로 사이사이에 둥지를 튼 '부엉이 다락', '깨솔솔 오두막'과 같은 친근한 이름의 쉼터들은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이 정원만의 매력 포인트다. 벽돌과 나무 기둥, 타일 마루로 운치를 더한 오두막 아래 혹은 숲 그늘 아래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숲의 기운이 머리끝까지 전해진다. 방문객들은 이곳에 잠시 근심을 내려놓은 채 정적 속에서 깊은 사색에 잠기거나, 함께 온 이들과 담소를 나누며 그림 같은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높게 뻗은 향나무 숲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는 가족 방문객의 모습. /정원주 제공

◇반려견 포용·남도 상생의 가치

또한 '천 개의 향나무 숲'은 민간정원으로서는 드물게 반려견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멀리서 정원을 찾아왔다가 반려견 동반이 안 돼 발길을 돌려야 했던 방문객들을 외면할 수 없어 내부 정리를 거쳐 개방했다. 맹견이나 대형견이 아닌 이상, 잔디밭과 숲길을 반려견과 함께 평화롭게 산책할 수 있는 이 환경은 많은 반려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한다.
드넓은 잔디밭과 푸른 향나무 울타리가 펼쳐진 '웃음광장'. 반려견과 함께 평화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공간이다. /박정석 기자
정원 한쪽에 자리한 카페와 전시관은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꾀하는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구례 특산물인 산수유차를 맛볼 수 있는가 하면, 지역 작가들의 미술품을 전시해 정원을 찾는 이들에게 남도의 멋과 향을 자연스럽게 전한다. 정원이 단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구례라는 지역의 가치를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 돼야 한다는 정원주의 소신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빽빽한 나무 가지 사이로 볕이 쏟아지는 '사색의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음의 잡념이 자연스럽게 씻겨 내려간다. /박정석 기자

◇세월이 선물하는 안식처

사계절이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품고 있지만, 정원주가 꼽은 숲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금목서와 은목서 향이 정원 전체를 그득하게 채우는 9월과 10월이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퍼지는 은은한 꽃향기 속에서 차 한 잔을 나누는 풍경은 오래된 흑백 사진 속 아련한 휴식의 순간을 선사한다. 그러나 꼭 꽃이 피는 시기가 아니더라도 봄의 싱그러운 새순, 여름의 짙은 녹음, 겨울 정원이 건네는 비움과 정갈함 등 계절의 변화 자체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가치는 충분하다.
정원 내부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티 테이블. 좋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박정석 기자
정원을 가꾸며 마주하는 실질적인 어려움에 대해 정원주는 성숙한 관람 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막대한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정원과 개인이 사재를 털어 가꾼 민간정원을 단순히 관람료의 액수나 꽃의 화려함만으로 비교하는 시선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숲이 가진 세월의 깊이와 자연스러움을 조용히 감상하고, 자연이 건네는 위안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성숙한 시선이 함께할 때 민간정원 생태계 역시 지속 가능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푸른 향나무 숲을 화사하게 물들인 홍매화의 붉은 물결.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생명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정원주 제공

'천 개의 향나무 숲'은 화려한 인공 구조물로 눈을 자극하기보다는, 십수 년의 세월이 빚어낸 묵직한 세월의 기품으로 방문객을 보듬는다. 숲길을 천천히 거닐다 오두막이나 의자에 앉아 서너 시간 사색에 잠겨도 지루하지 않은 곳,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지친 마음을 충전하고 다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어 가는 곳. 구례의 이 초록빛 안식처는 오늘도 변함없는 푸르름으로 길손들에게 조용한 쉼표를 건네고 있다.
/박정석 기자 pjs@namdonews.com <공동기획=남도일보·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