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의 세상 땜질] 감정 과몰입 유행으로 행복해졌는가?

천현우 용접공·작가 2026. 11. 4.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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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을 대표하는 단어는 ‘근면성실’이다. 선배 세대들은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노동, 가정, 수면밖에 없는 사람들 같았다. 삶의 방식이 힘겹고 단조로웠던 만큼 어쩔 수 없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몰개성. 공장 다니던 형님들은 자기 취향이 없었다. 애창곡 박자 하나 못 맞춰서 쩔쩔맸다. 대화 주제는 늘 낚시, 주식, 부동산 아니면 자동차였다.

하고 싶은 취미가 생겨도 본질보다는 일단 장비부터 알아보기 바빴다. 여유를 갖고 돌아볼 시간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 매사 시간을 돈으로 땜질하려는 모습이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고통스러운 시대에 기꺼이 적응한 그들의 모습은 존경스럽지만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역시 행복해지려면 자기 자신과 감정을 잘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과거의 생각을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역시 뭐든 과유불급이다.

요즘 청년들의 유행 키워드 중 하나는 ‘멘헤라’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혹은 그런 사람 자체를 뜻한다. 주로 젊은 연인 사이에 오가는 온갖 감정적 기행을 희화화하는 용도로 쓰인다. 긍정적인 요소는 있다. SNS에 자주 노출되면서 흠결처럼 여겼던 성질이 개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요소는 크다. 진짜 치료가 필요한 질환과 그저 감정적일 뿐인 행위를 혼동할 수 있다.

이런 희화화 배경엔 청년 세대의 고통이 깔려 있다. 내 삶은 더더욱 불안해져만 가는 괴리감과 어찌 살지 오롯이 혼자 설계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크다. 과거엔 노력만으로 쟁취할 수 있던 삶의 방식을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현실이 청년을 괴롭힌다. 근데 의문도 든다. 이 아픔이 단지 기술 발전 혹은 정치나 사회 같은 바탕 조건에서만 올까. 감정에 과몰입하길 요구하는 세상이 삶을 실제 현실보다 더 힘들다고 느끼게 하는 건 아닐까.

지난 15년 동안 ‘노오력’을 강조하던 자기계발 광풍은 사그라졌다. 대신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의 힐링 유행 시대가 왔다. 막연하던 내 감정에 이름, 원인, 증상이 붙었다. 트리거 워닝, 가스라이팅, 나르시시스트 등. 예전엔 접하기 어렵던 용어가 일상화되었다. 단어가 포괄하는 범위는 끝없이 넓어졌지만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져 갔다. 인터넷에선 자신이 ADHD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주장을 과거보다 훨씬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유행 속에서 누가 가장 이익을 보았을까? SNS 플랫폼이다. SNS는 사람의 감정을 수익 모델로 활용한다. 이용자의 시간을 플랫폼에 1초라도 묶어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심리학, 뇌과학, 정신의학 등 온갖 전문의들의 발언이 앞뒤 다 잘린 채 숏폼으로 나돈다. 기분 잡치는 극단적인 주장을 유통하는 한편,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과 콘텐츠를 노출해 내 감정에 더 과몰입하고 표현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SNS에 시간을 뺏기는 동안 플랫폼 기업은 광고로 떼돈을 벌었다.

감정 과몰입 유행이 과연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했는가? 개인의 삶을 더 낫게 했는가? 아닌 듯하다. 감정에는 정답이 없다. 마음먹기 나름이란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일하다 실수해서 상사에게 꾸중을 들었다 치자. 그 상사의 의도는 피드백일까 화풀이일까. 알 수 없다. 상사 본인도 자기 마음을 모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럴 땐 답 안 나올 감정에 집중하기보단 상황을 성장의 기회로 삼든지 똥 밟았다 치고 넘어가든지 해야 한다. 하지만 SNS에 떠도는 인간관계 조언은 대체로 무조건 ‘당사자가 옳다’는 식이다. 나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슬기롭게 넘길 지혜 대신 감정이 발생한 원인을 파헤치고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간관계를 ‘손절’하라는 조언이다. 내가 아픈 원인은 구구절절한데 서늘할 정도로 단순한 이 해결책은 청년들에게 ‘나는 소중하다’가 아니라 ‘나만 소중하다’를 학습시킨다. 더구나 그 결과로 마음이 곶감처럼 단단해지기는커녕 홍시처럼 물러진다. 이젠 오히려 감정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해진 시대 아닐까 싶다. 감정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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