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쓸개즙과 여성

큼직한 오동잎이 뚝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가을비가 내렸다. 입동을 코앞에 두고 기온도 제법 내려갔다. 따스운 국물이 생각나는 때다. 나무 궤짝에 든 생선을 찍어내듯 꺼내 통나무 도마에서 칼집 낸 언 동태 토막을 뒤집어 보며 어머니는 혹시라도 쓸개가 남아 있는지 세심히 닦달하곤 했다. 쓰디쓴 쓸개즙이 애써 끓인 동탯국의 맛을 통째로 버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국을 먹다 쓴 여운이 느껴지면 나는 으레 음식 가공 과정에서 쓸개 뒤처리가 미흡했거니 생각하게 됐다.
쓴맛 본성을 이름에 드러낸 쓸개즙은 지방을 소화하는 으뜸 공신이다. 사실 소화란 음식물을 잘게 부숴 물에 녹이는 일이다. 그래야 영양소는 비로소 세포가 쓸 수 있는 화학적 형태로 바뀐다. 그러므로 수용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지방을 녹이고 분해하려면 붙임성 있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게 쓸개즙이다. 담즙산(膽汁酸)이라고도 불리는 쓸개즙은 한쪽에 수용성 좋은 산(酸)과 수산기(水酸基)를, 다른 한편에는 지방에 친한 구조를 갖는 양쪽성 물질이다.
우리는 콜레스테롤로 담즙산을 만든다. 건강검진 할 때마다 수치를 신경 써야 하는 물질로 악명이 높지만, 콜레스테롤은 37조개에 이르는 세포의 담장인 세포막의 필수 구성 요소이다. 담장을 견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웃 세포와 신호를 주고받는 데 긴요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 그렇다면 콜레스테롤은 세포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붙박이였던 오래된 물질일까? 아니다. 콜레스테롤을 가공할 때는 산소가 필요하다. 산소가 풍부한 공기를 호흡하는 덕분에 우리는 대기 중에 산소가 늘 있었으리라 여긴다. 하지만 지구 역사에는 산소가 없던 긴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남세균이, 그 뒤를 따라 식물이 순차적으로 진화하면서 본격적으로 지구 대기에 산소가 쌓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산소의 있고 없음이 지구 역사를 크게 둘로 나눈다. 콜레스테롤은 산소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무대에 등장한 세포계의 총아다.
다만 옥에 티라면 콜레스테롤을 중용하기엔 이 물질의 난용성(難溶性)이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다. 세포막에 두루 박아 두기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호르몬 신호물질이나 소화 도우미로 쓰임새를 확장하려면 화학적 가공이 시급했다. 이에 다세포 동물은 콜레스테롤의 구조를 크게 고쳐 수용성을 극대화했다. 물에 녹는 콜레스테롤인 담즙산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어 콜레스테롤을 섭취하기도 하지만 양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렇기에 간(肝)에서 콜레스테롤 대부분을 합성한다. 그중 절반쯤 뚝 떼서 담즙산을 만든다. 이 담즙산은 십이지장으로 쏟아져 나가 자신의 소임을 다한 뒤 재흡수돼 장과 간 사이를 순환한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연유로 간을 다치면 지방 대사가 차질을 빚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대한간학회는 1988년부터 약 20년 동안 건강검진을 받은 성인남녀 75만명의 자료를 분석한 후 40대 남성의 알코올성 지방간 유병률이 급격히 올라간다고 보고했다.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하지만 50대 이후 여성에서 특히 지방간 유병률이 올라가는 현상은 다소 의외였다. 연구진은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의 비율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와 피로감 그리고 늘어난 음주 기회가 아마도 그 원인일 것으로 진단했다.
지난달 생명과학 학술지 ‘셀’ 온라인판에 발표된 논문에서 중국 연구진은 폐경 이후 여성에서 만성간질환의 빈도가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하면 젊은 여성은 같은 연령대의 남성보다 간질환의 위험도가 눈에 띄게 낮다. 폐경 전후로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상반된 현상은 대개 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때문인데, 젊었을 때 유효했던 이 물질의 보호 효과가 급격히 줄면서 간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담즙산처럼 에스트로겐도 변형된 콜레스테롤이다. 탄소가 27개인 콜레스테롤 분자를 가지 쳐 탄소 수를 24개로 줄인 담즙산, 탄소 수가 18개인 에스트로겐이 차곡차곡 빚어졌다. 에스트로겐은 혈중을 떠돌다 장 안으로도 고개를 내민다. 이 호르몬은 장내 세균의 구성과 기능을 여성 친화적으로 바꾼다. 구체적으로 에스트로겐은 여섯 종류의 장 세균을 부추겨 특정한 담즙산을 만들고 콜레스테롤 대사를 촉진해 여성의 간 손상을 누그러뜨린다. 따라서 장 세균의 구성은 남녀가 유별하다(microgenderome). 진화는 왜 한쪽 성에게만 특별한 보호 기제를 부여했을까? 잘 모른다. 하지만 콜레스테롤을 포함한 지방 대사가 여성을 선호함은 확실하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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