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길 끝에서, 사람의 온기를 만나다 [ 해외트레일 l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 ①
[<사람과 산> 서경석 객원기자]

Day 55: 새 신발의 설렘과 멈춰 서서 기다려주는 우정
오후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이지만 일찌감치 캠프사이트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함께 길을 걷는 하이킹 버디의 발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발목 앞쪽의 통증. 일단 오늘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내일 아침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단순한 근육통이면 좋으련만, 길 위에서의 부상은 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일찍 자리를 잡은 덕분에 시간 여유가 생겼다.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간식을 먹고, 또 스낵을 꺼내 먹고… 계속해서 먹으며 에너지를 채운다. 갑작스러운 휴식에 내 발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다.
오늘 트레일 상태는 최상이었고, 내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 새로 산 신발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워 기분까지 날아갈 듯했다. 비록 오전 6시 반이라는 다소 늦은 시각에 출발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거리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충만했다.
하지만 지난 3주 가까이 동고동락해 온 동료의 고통을 무시하고 혼자 나아갈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진통제를 건네고,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불을 피워주며 곁을 지킨다. 나의 이 작은 배려가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Day 56: 다시 시작된 솔로 하이킹과 NOBO들을 향한 응원
동료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상황으로는 하루가 아니라 이틀 이상 푹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웠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다시 회복하리라 믿으며, 우리는 각자의 길을 위해 계획을 수정했다. 나는 '제로 데이' 없이 그대로 전진하기로 했다.
워싱턴과 오레곤의 경계선 이후로 3주 넘게 이어졌던 동행이 마침표를 찍고, 다시 혼자만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늘 곁에 있던 동료가 없다는 사실이 퍽 허전하게 다가오지만, 만남과 헤어짐이 일상인 트레일 라이프의 숙명 아니겠나. 이 적막함조차 즐겨야 하는 것이 하이커의 숙명.
어제 4명에 이어 오늘도 6명의 NOBO를 만났다. 이제 길 위에서 그들을 마주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은근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몇몇은 얼굴이 환하지만, 몇몇은 어두운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꼴찌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눈이 내리기 전에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그들의 얼굴에 보였다. 그런 낌새가 보일 때마다 나는 평소보다 더 크게 외쳐준다.
"You are the champion!!! You can do it!!!"
그럼 그들은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내민다. 내 주먹과 그들의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묘한 연대감이 흐른다. 또한 "어제도 NOBO 몇 명을 봤고, 오늘 네 앞에도 몇 명이 있다"고 말해주면, 그들은 "정말? 내 앞에 누군가 있구나!"라며 눈을 반짝이며 힘을 얻는다. 누군가 자기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이커에겐 거대한 위안이 되는 법이다.

Day 57: 12일 만의 샤워와 '애기 엉덩이' 같은 트레일
다시 혼자가 되었다. 걷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음을 느낀다. AT종주 때는 카메라를 보며 혼잣말이라도 곧잘 했었는데, 이번 PCT에서는 입을 뗄 일이 별로 없어 조금 어색하기까지 하다. 뭐, 워낙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니 곧 이 적막함도 익숙해질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많은 NOBO들이 입을 모아 추천했던 '게스트 랜치(Guest Ranch)'다. 오전 6시 40분이라는 늦은 시각에 출발했지만 길 상태가 기가 막혔다. '애기 엉덩이'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 덕분에 약 50km에 달하는 거리를 오후 5시도 안 되어 주파했다. 이곳은 은퇴 후 집을 팔아 이 목장을 사고 하이커 쉼터로 꾸민 크리스천 부부, 린다(Linda)와 마이크(Mike)가 운영하는 곳이다.
단돈 25달러에 캠핑, 샤워, 빨래, 그리고 든든한 저녁 식사까지 제공되니 하이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이다. 쿨하고 자상한 린다는 아들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덕에 한국에도 몇 번 가봤다며 반가워했다. 특히 산 곳곳에 놓인 한국의 운동기 구들이 인상 깊었다며 웃는 모습에 고향 생각이 잠시 스쳤다.
샤워실에 들어가 몸을 씻어내는데, 무려 12일 만이다. 오레곤의 마지막 마을 애슐랜드(Ashland)에서 씻은 게 마지막이었으니 그동안 내 몸엔 캘리포니아의 먼지가 층층이 쌓여있었을 터다. 세 번이나 비누칠하며 닦아내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흔적들이 있다. 오레곤부터 이어진 모래와 먼지 트레일 때문에, 거울 속 내 모습은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적어도 이 길을 걷는 행운아니까.

글.사진 서경석 객원기자 ㅣ 미국 AT·PCT를 완주한 장거리 하이커. 해외 트레킹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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