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속한 책과 마지막 독자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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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일본인이 엑스(X)에 올린 글을 읽었다. 부모님이 헌책방을 하는데 나이 든 신사가 몇권의 에로 만화를 골라 계산하고 나갔다. "저분, 전에는 어려운 불교 이론서만 사가더니 요새는 에로 만화책밖에 안 사시네."
왜 저 신사는 오랜 단골 가게에서 체면의 상실을 무릅썼을까? 그래서 셋째 해석은, 이분이 에로 만화를 구입하던 헌책방이 원래 따로 있었을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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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며칠 전 어느 일본인이 엑스(X)에 올린 글을 읽었다. 부모님이 헌책방을 하는데 나이 든 신사가 몇권의 에로 만화를 골라 계산하고 나갔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분, 전에는 어려운 불교 이론서만 사가더니 요새는 에로 만화책밖에 안 사시네.”
도쿄의 헌책방 거리에서 보았던, 빈틈없는 정장 차림에 무테안경을 쓴 백발의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직 대학교수들 같은 느낌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손에 든 종이봉투 안에 에로 도서를 감추고 있던 사람도 한두명은 있었을지 모른다.
위의 이야기를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불교책’과 ‘에로 만화’의 대비이고, 또 하나는 그 비범한 취향의 이행을 10년 이상 지켜봤을 것 같은 가게와 단골손님의 관계이다. 대략 이런 해석들이 가능한 것 같다. 첫째, 사람은 역시 나이를 먹으면 지성은 쇠퇴하고 욕망만 남는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 욕망에 솔직해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솔직함의 실체는 저런 구매인 것이다. 둘째, 어려운 책을 읽으며 지성을 갈고 닦는 것이 어느 순간 무의미해지는 나이대가 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예외겠지만 취미로 인문 교양서를 읽던 일반인들은 그럴 수 있다.
다만 책 장사를 하는 사람이 보기에 여기서 뭔가 말해지지 않은 요소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체면’이라는 것인데 이는 생각처럼 간단히 포기되지 않는다. 왜 저 신사는 오랜 단골 가게에서 체면의 상실을 무릅썼을까? 그래서 셋째 해석은, 이분이 에로 만화를 구입하던 헌책방이 원래 따로 있었을 가능성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 가게에서 살 수 없게 되어(문을 닫는 바람에), 체면 상실을 감수하고 불교 서적을 사던 가게로 일원화하게 된 것 아닐까.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건 사람들 반응의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사고 읽는 것은 개인의 내면적 쾌락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행위 자체는 강렬한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사실 이건 책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빠르게 인격을 판단하려는 욕구이며, 이 이야기의 흥미도 거기서 나온다. 그가 뭘 읽느냐 가지고 인격 판단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책과 연결된 호기심을 우리가 유지한다는 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얼마 전 젊은 업계인들과 질의응답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삼십년 전과 비교하여 업계에서 가장 달라졌다고 느낀 게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모든 책, 모든 독자가 교양 있어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교양 있는 책과 사람만 남았다. 전에는 안 그런 경우가 더 많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어느 쪽이 더 좋은 건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교양이 우위가 아니던 때다. 세상에 뭐 저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나 싶었던 시절, 친척집에 가면 그런 책들이 굴러다녀 괴롭던 시절이 이 업계의 행복한 시절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온전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뻔한, 이제 굳이 할 필요 없는 얘기를 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가진 책과 출판에 대한 환상은 그 시절에서 온 것이다.
책이 저속함을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던 시절, 이제 젊은 독자들은 잘 모를 시절을 저 일본 할아버지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저속한 책을 사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청소년기의 두근거림을 반복하고 싶어서 지금도 저런 책을 사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분야를 또 뭐로 바꾸든, 마지막 날까지 책을 사 가는 건 저런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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