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 ‘김’이라 부르지 못하는 슬픈 현실 [최지아의 미식코리아]

2026. 11. 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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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온 한식. 20여 년간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의 맛을 알려온 최지아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 대표가 한식과 K관광의 트렌드를 소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합니다.

외국인 미식가들에게 김밥을 소개할 때마다 나는 종종 말문이 막힌다.

다행히 김 역시 아시아 규격을 넘어 세계 규격 표준화와 'GIM' 영문 표기 통일화 작업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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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미식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온 한식. 20여 년간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의 맛을 알려온 최지아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 대표가 한식과 K관광의 트렌드를 소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합니다.
김이 포함된 정갈한 한식 상차림.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 제공

“김밥(Gimbap)은… 밥과 채소를 말린 시위드(Seaweed) 혹은 노리(Nori)로 감싼 음식입니다.”

외국인 미식가들에게 김밥을 소개할 때마다 나는 종종 말문이 막힌다. 음식 이름의 첫 글자가 분명 ‘김’인데, 정작 그 김을 설명하려면 ‘노리’(일본어)나 ‘시위드’(영어)라는 남의 나라 단어를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 기묘하게 느껴져서다. 수출액 수억 달러를 돌파하며 세계인의 식탁을 사로잡은 ‘검은 반도체’의 위상이, 정작 언어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일본의 그늘이나 서구식 뭉뚱그림에 갇혀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지난겨울, 한국을 찾은 채식주의자 그룹과 함께한 해조류 쿠킹 클래스는 우리 미식이 직면한 언어적 한계를 뼈아프게 절감한 현장이었다.

김, 미역, 매생이, 파래, 청각, 곰피. 한국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코끝에 바다 내음과 오독오독하거나 부드러운 식감이 절로 떠오르는 친숙한 식재료다. 하지만 서양인의 세계관에서 이들은 그저 발에 밟히는 잡초를 뜻하는 ‘시위드’로 납작하게 환원될 뿐이었다.

외국인 수강생들이 한식 수업을 듣고 있다.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 제공
외국인 수강생에게 해초의 종류를 설명하기 위해 그린 그림.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 제공

말문이 막힌 나는 학창 시절 생물 시간에 배웠던 녹조류, 홍조류, 갈조류의 기억을 떠올리며 칠판에 바다의 단면을 그렸다. 햇빛이 가장 내리비치는 얕은 조간대에 매생이와 파래, 사슴뿔 모양의 청각이 자라고,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틈엔 붉은빛의 김이, 조금 더 깊은 물속에는 미역이 숲을 이루며, 가장 깊은 암반 바닥에는 오돌토돌한 곰피가 군락을 이룬다는 수심별 생태를 설명했다. 그제야 참가자들의 눈이 반짝였다. 서구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던 ‘바다 채소의 결’을 비로소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글로벌 미식 트렌드 세터들은 해조류를 ‘잡초(Seaweed)’로 낮잡아 부르는 대신 ‘바다 채소(Sea Vegetables)’라 칭하며 주목하고 있다. 겨울철 통통한 굴을 넣은 시원한 미역국,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매생이국, 식초와 어우러져 청량하게 입맛을 돋우는 파래무침, 곰피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때의 오독오독한 치감까지. 쿠킹 클래스 참가자들도 다른 식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채로운 향과 식감에 연신 감탄했다. 그러나 정작 이 매력적인 식재료들을 각기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마땅한 단어가 없다는 사실은 씁쓸한 복병이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한식 세계화의 빈틈이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랑스 샹파뉴의 스파클링 와인이 ‘샴페인’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명사로 세계를 정복했듯, 식재료 이름은 단순한 라벨이 아니라 수천 년간 축적된 한 민족의 생태적 지식과 생활문화를 압축한 문화유산이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김밥 돌풍'을 일으켰던 국내 한 식품업체의 '냉동 김밥'. 김소희 기자

현장에서 외국인을 마주할 때마다 고유한 언어가 지닌 힘을 거듭 실감한다. 상대의 눈높이에 맞춘다며 깻잎을 ‘코리안 허브’로, 메주를 ‘소이빈 케이크’로 번역해 건네기보다 우리말 그대로를 들려줄 때 그들의 눈빛은 훨씬 진지해진다. 전을 ‘부친다’나 ‘지진다’처럼 다른 언어로는 결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섬세한 미식의 결을 날것 그대로 마주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감탄이 터져 나오는 법이다. 바다 채소 또한 제 이름을 당당히 말할 때 비로소 그 본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과거 김치가 일본식 ‘기무치’에 밀릴 뻔한 위기를 딛고 2001년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 ‘KIMCHI’라는 제 이름을 당당히 새겨 넣었듯, 이제는 김을 비롯해 바다 채소들이 제 이름을 찾을 차례다. 다행히 김 역시 아시아 규격을 넘어 세계 규격 표준화와 ‘GIM’ 영문 표기 통일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나 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가 현장에서 김을 ‘노리’라 부르고 무를 ‘다이콘’이라 양보하는 순간 식문화 주권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음식의 세계화란 단순히 남의 입맛에 맞춰 요리를 파는 일이 아니다. 우리 식재료의 섬세한 이름과 고유한 결을 세계인의 언어 속에 당당히 각인시키는 일이다.

머지않은 날, 뉴욕이나 파리의 작은 식당에서 외국인이 김밥을 한 입 베어 물며 “노리로 감싼 롤” 대신, 너무도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Gim”을 발음하는 순간을 기다려 본다. 우리 바다의 숨결이 깃든 이 소박한 반찬이, 세계인의 일상적인 식탁과 대화 속에서도 비로소 제 이름을 편안하게 찾아가는 그런 날을 말이다.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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