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가을을 붙들자

한겨레21 2026. 11. 4.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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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이 생긴 이후로 여름휴가는 가지 않는다. 날씨가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여름에 농사짓다보면, 부채 장수와 우산 장수를 모두 자식으로 둔 어미 심정이 된다.

텃밭에 나가 가을 가지, 오크라, 고추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따다가 '누카즈케'를 만든다.

가을이 서늘하지 않아도 씨앗은 맺히고, 농사의 시간도 변함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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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들]―인천 계양 편
사계절 공존하던 홋카이도의 풍경… 계절 놓칠세라 텃밭 채소로 만든 ‘누카즈케’
여행지에서 사온 종이 모종 포트. 가운데 놓인 길쭉한 종이를 펼치면 벌집 모양의 모종 포트가 된다.

밭이 생긴 이후로 여름휴가는 가지 않는다. 날씨가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여름에 농사짓다보면, 부채 장수와 우산 장수를 모두 자식으로 둔 어미 심정이 된다. 해가 떠도, 비가 와도 늘 날씨 걱정이라 자리를 오래 비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린 올여름, 나는 가상의 우산 장수 자식과 함께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10월 중순에도 반팔이 자연스러운 날씨라, 10월 초 이미 첫눈이 내렸다는 일본 홋카이도로 늦은 휴가 겸 도망을 가기로 했다. 남들보다 빨리 겨울의 한기를 맛보리라 기대하며 털실로 짠 목도리와 귀마개까지 잔뜩 챙겨 캐리어를 채웠다. 그런데 웬걸, 삿포로에 도착해 우리 동네 인천 귤현동 날씨를 검색해보니 오히려 그쪽 기온이 5도나 더 낮다. 한낮의 삿포로 거리에선 얇은 경량 패딩마저 짐이 됐다.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에는 반팔 티셔츠부터 코트까지 사계절이 기묘하게 공존했다.

계절을 알 수 없는 인파를 뚫고 현지 씨앗 가게로 향했다. 검역 때문에 씨앗을 사올 수는 없어도, 낯선 지역의 씨앗 가게를 둘러보는 건 농사꾼에게 필수 코스다. 씨앗 봉투를 들여다보며 이곳 사람들은 어떤 작물을 기르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상상하는 재미가 여행의 메인 콘텐츠다. 어떤 새로운 채소를 만나게 될까,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는데 씨앗 매대가 텅 비어 있었다. 적막한 가게 안에서 한참 ‘스미마센’을 외치자, 안쪽에서 직원이 나와 난감한 얼굴로 ‘시즌 오프’라 씨앗은 다 팔렸다고 말한다.

가게 밖에는 여전히 반팔 차림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데, 농사의 계절은 이미 끝나버렸다니. 이것이 기후위기가 만든 풍경인지, 그저 환절기가 주는 일시적 혼란인지 잘 모르겠다. 빈손으로 나오기 아쉬워 두리번대다 가게 한편에서 종이로 된 다양한 모종 포트를 발견했다. 접힌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펼치면 벌집 모양이 되는 포트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플라스틱 쓰레기 타령을 하는 동료 농민들에게 이보다 좋은 기념품은 없겠다 싶어 몇 개 집어 들었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떠나기 전 갈무리하다 깜빡하고 식탁 위에 방치해둔 토종 고추 ‘음성재래초’가 예쁘게 말라 있었다. 문을 꼭꼭 닫고 떠나 환기도 잘 안 됐을 텐데, 건고추를 만들기 딱 적당한 온도와 습도였나보다. 문득 ‘가을볕을 놀리면 가난하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아도 작물이 이토록 잘 마르는데, 갈무리 없이 이 계절을 허비하는 건 직무유기다.

마음을 다잡고 겨울을 날 준비에 돌입하기로 한다. 텃밭에 나가 가을 가지, 오크라, 고추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따다가 ‘누카즈케’를 만든다. 미강(쌀겨)을 구수하게 볶아 소금물로 반죽한 ‘누카도코’에 매일매일 작물을 박아 넣으며 가을을 저장한다.

지난달 질리도록 따 먹은 줄기콩이 누렇게 쇠어가니 이제는 씨앗을 받을 때다. 오크라도 나무처럼 단단해진 것은 내년 씨앗이 되도록 밭에 그대로 둔다. 올해도 심지 않았는데 저절로 자라 풍성하게 달린 동부와 팥을 거둬, 음성재래초가 말랐던 바로 그 식탁 위에 펼쳐놓는다. 계절이 제멋대로 흘러가니 뭐라도 붙잡아보려 손을 움직여본다. 먹거리도 씨앗도 부지런히 갈무리하다보면 어느새 내년 농사가 다시 시작되니까. 가을이 서늘하지 않아도 씨앗은 맺히고, 농사의 시간도 변함없이 흐른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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