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만원어치 귀금속 산 직후 ‘빚 탕감’ 신청
경기도 사는 40대 여성 A씨는 지난해 11월 백화점 명품관에서 300여 만원, 피부 관리에 200만원을 카드 결제했다. 지난 1월에는 카드 할부로 귀금속 1400만원어치를 샀다. 이후 한 달여 만에 카드 대금을 연체했고, 3월에 채무조정을 신청했다. A씨는 카드 빚 3300만원 중 1900만원을 감면받을 예정이다.
생활고에 버티다 못해 개인회생과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채무조정으로 빚을 탕감받기 직전까지 명품과 귀금속을 사들이고 카드 빚을 잔뜩 늘리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빚 갚기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목적인 채무조정 제도를 악용하는 것이다. 성실하게 빚을 갚는 사람들과의 형평성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큼 ‘도덕적 해이’를 막을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채무조정 직전 22%는 카드 더 썼다
3일 신한·삼성·현대·KB국민·롯데·하나·우리·BC카드 등 8개 카드사가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8월 채무조정(개인회생·개인워크아웃) 신청 36만531건 중 7만9701건(22.1%)은 신청 3~6개월 전보다 직전 1~2개월의 월평균 카드 사용액이 늘었다. 채무조정 신청자 5명 중 1명꼴로 신청을 앞두고 오히려 카드 씀씀이가 커진 셈이다.

전체 신청자의 월평균 결제액은 같은 기간 83만7977원에서 58만340원으로 약 31% 줄었다. 반면 카드 지출이 늘어난 신청자의 월평균 결제액은 66만6814원에서 160만5691원으로 2.4배로 뛰었다. 이들의 시계·귀금속·가방 관련 월평균 결제액은 6만3000원에서 77만7000원으로 치솟았다. 미용·피부관리 지출도 1만7000원에서 10만8000원으로 늘었고, 유흥주점·주류 결제액은 3만6000원에서 13만5000원으로 증가했다.
◇5600만원 고급차 사고 채무조정
수천만 원짜리 고급 승용차를 카드 할부로 구입한 뒤 불과 몇 달 만에 채무조정을 신청한 사례도 있었다. 서울 사는 50대 남성 B씨는 지난해 11월 5596만원짜리 제네시스 GV80을 카드 할부로 샀다. 올해 2월부터 대금을 연체하다 4월 채무조정을 신청했다. 5000만원이 넘는 카드 빚 대부분을 탕감받고 갚아야 할 돈은 이제 1000만원 정도 남았다.
충남의 40대 남성 C씨는 지난 3월 법무사 비용 770만원을 카드로 낸 직후 채무조정을 신청했다. 통상 개인회생 대행 비용은 150만~200만원 수준이다. 카드 업계 관계자는 “결제 금액 일부를 현금으로 돌려받는 거래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채무조정 심사 강화 지적
채무조정을 담당하는 기관들은 제도 악용을 막기 위한 검증 장치가 마련돼 있다는 입장이다. 신용회복위원회 관계자는 “최근 카드 사용 내역과 소득·재산 등을 심사하고, 신청 전 6개월 이내 새로 받은 대출이 전체 빚의 30%를 넘으면 원칙적으로 신청을 제한한다”며 “상담부터 심사, 채권금융회사 동의, 사후 점검까지 5단계 검증을 거친다”고 했다.
하지만 채무조정 심사에서 빚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하더라도, 빌린 돈을 어디에 썼는지까지 꼼꼼히 따져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카드사 등이 비정상적인 거래를 알려오면 추가 심사에 나서지만, 모든 신청자의 카드 사용처를 일일이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신청 직전 1~2개월간 카드 사용 내역을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해 비정상적인 소비를 걸러내야 한다”며 “생계형 채무와 사치·투기성 소비를 구분해 빚을 감면해 주는 비율도 달리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가 빚 탕감과 채무조정 정책을 확대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제도 악용을 막기 위한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성훈 의원은 “성실히 빚을 갚는 국민을 비웃는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며 “사전 검증과 사후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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