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대신 한글 품은 한지…전광영 런던서 시간을 빚다

오석기 기자 2026. 11. 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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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전광영(82·사진 ) 작가가 해외 전시장에서 종종 듣던 질문이다. 고서에 쓰인 한자는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문자였다. 그런데 외국 관람객들의 눈에는 한국 작가가 한자를 쓰는 것이 영 의아했던 모양이다.

홍천 출신의 세계적인 한지 조형작가 전광영이 한글을 들고 영국 런던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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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출신 세계적 작가, 런던서 ‘집합: 종이와 시간의 기억’ 개인전
한글을 새긴 신작 통해 기억과 정체성의 새로운 조형 언어를 모색

“As a Korean artist, why do you use Chinese characters?”
“한국 작가인데 왜 한자를 쓰시나요?”

그동안 전광영(82·사진 ) 작가가 해외 전시장에서 종종 듣던 질문이다. 고서에 쓰인 한자는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문자였다. 오래된 책장에 스며든 사람들의 생각과 삶, 무엇보다 시간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외국 관람객들의 눈에는 한국 작가가 한자를 쓰는 것이 영 의아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 질문이 새로운 작업을 향한 출발점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홍천 출신의 세계적인 한지 조형작가 전광영이 한글을 들고 영국 런던을 찾았다. 지난달 9일 한글날에 맞춰 ‘선다람 타고르 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집합 | 종이와 시간의 기억(Aggregation | The Memory of Paper and Time)’을 위해서다. 전시장에는 런던을 위해 만든 신작을 비롯한 근작들이 펼쳐져 있다. 특히 한글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집합’ 연작 12점 이상이 눈길을 끈다.

Aggregation 26 - AU049 (STAR 8) 사진=전광영 스튜디오
현지 매체에 소개된 전광영 작가의 전시 기사. 이 기사는 ‘아시안 아트 인 런던(Asian Art in London·AAL)’ 기간에 맞춰 개막한 이번 행사가 수십 년에 걸쳐 기억과 역사, 시간을 탐구해 온 전광영의 작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는 전시라고 적고 있다. 특히 AAL의 주요행사라고 밝히고 있다. mayfair times 캡쳐.

작업 방식은 익숙하다. 한지를 정성껏 접고 물들이고 감싸 작은 삼각형을 만든 뒤, 이를 수천 개씩 이어 붙인다. 평면에서 불쑥 솟아오른 돌기와 깊숙이 파인 자리는 빛과 그림자를 불러들인다. 가까이 보면 종이 조각인데, 멀찍이 서면 오래된 산맥이나 낯선 행성의 표면처럼 보인다. 회화라 하기에도, 조각이라 부르기에도 조금씩 어긋난다. 그가 말하는 ‘제3의 공간’이다.

Aggregation 26 - JU034 사진=전광영 스튜디오

그런데 이번에는 종이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달라졌다. 한자가 빼곡했던 고서 대신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담은 글을 전통 한지에 인쇄했다. 장인이 손으로 만든 한지다. 1446년 세상에 나온 훈민정음이 580년의 세월을 건너 런던의 현대미술 전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이번 변화는 단순히 한자를 한글로 바꾼 일이 아닐 듯하다. 작가는 과거의 기록을 축적하는 데서 지금 살아 있는 시간을 만들어 축적하는 쪽으로 나아가겠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옛것을 버리겠다는 뜻도 아니다. 한지의 결, 손으로 감싸는 노동, 작은 조각이 모여 만들어지는 풍경은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그 표면에 올라앉은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불러내는 현재의 감각이다.

영국 런던의 선다람 타고르 갤러리에 전시된 전광영 작가의 작품들. 사진=영국 런던 선다람 타고르 갤러리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한글의 등장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태도다. 언어를 앞세워 한국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대신, 글자를 다시 읽을 수 없는 물질로 돌려놓는다. 글자 하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도 작품을 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글을 아는 관람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낱글자들이 가려졌다 나타나는 화면에서 익숙한 소리와 낯선 형상을 동시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 ‘Aggregation 26 - JU034’은 런던의 주요 아시아 미술 전문 갤러리, 딜러 및 경매사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미술행사인 ‘아시안 아트 인 런던’ 개막행사에서 아시아 근현대미술상( Modern & contemporary Asian Art Award )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홍천의 한약방에서 시작된 기억이 미국을 거쳐 다시 런던까지 흘러왔다. 이번에는 한글이라는 옷을 입었다. 삼각형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그토록 오래된 시간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올 가을 런던에서 꼭 봐야할 전시 톱 5에 선정되기도 한 이 전시는 오는 12월 5일까지 런던 선다람 타고르 갤러리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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