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더봄] 내가 기억해 줄 친구의 시간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를 보고
친구와 함께했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친구의 초대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김혜자 배우가 주연을 맡은 <여전히 찬란하게>였는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두 소녀가 나누었던 우정이 현재에 이르는 모습을 담아낸 영화다.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혜자 배우가 남긴 편지글 때문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기자간담회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자 손편지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는 기사를 읽었다.
"작년 가을이었어요. 송일곤 감독님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순옥은 울지 않습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여전히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말이 참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슬픈 역사잖아요. 우리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해야 해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고 싶어 했는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들풀처럼 지내고 싶다'며 영화 출연을 고사했던 85세 김혜자를 돌려세운 '친구와 함께한 찬란한 시간'을 나도 만나보고 싶었다.
깊은 산속 마을에 사는 17살 순옥과 정임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언젠가 함께 서울로 올라가 노래 잘하는 정임은 가수를 하고 순옥은 그녀를 위한 단장을 맡겠다는 희망을 주문처럼 되뇌며 지내지만,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로 일본의 수탈과 강제 동원이 이어지던 때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는 순옥과 정임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음 세대를 잇는 역사와 그 안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 그들이 가지고 있던 희망을 전한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동원의 역사를 다루지만 고통만을 담는 것이 아닌 그 상황에서도 나누었던 우정과 사랑에 주목한다.
순옥은 누구보다 정임의 노래를 좋아했고, 정임이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은 가난하고 엄혹한 시대에도 웃음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순옥에게 정임은 평생 미안한 친구이면서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물론 순옥과 정임의 이야기를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어린 시절의 우정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두 소녀의 삶을 갈라놓은 것은 개인의 선택이나 세월의 흐름이 아니라 역사의 폭력이었다. 순옥이 품었던 미안함 역시 친구를 그리워하는 평범한 감정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내 마음속에 남은 것은 누군가를 오래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였다. 순옥은 친구가 겪은 비극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비극이 일어나기 전 정임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어 했는지를 끝까지 기억하려 했다. 순옥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친구를 기억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봐 두려워했다.
이 말에는 평생 친구를 잊지 못했던 사람의 슬픔과 마지막까지 그 이름을 지키려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기억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누군가의 삶을 세상에 남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순옥이 정임의 노래와 꿈을 기억했기에 우리는 정임을 역사 속 이름 없는 소녀가 아니라 한때 찬란하게 빛났던 사람으로 만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서로의 어떤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은 잊고 지내는 나의 꿈을 기억하는 친구가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친구들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 봤다.
김혜자 배우를 움직였다는 그 문장처럼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여전히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믿는 사람, 어쩌면 우리가 오래된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일은 그것일지 모른다.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그때의 너와 내가 참 빛났다고 말해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직 곁에 있는 친구들과 오늘의 시간을 다시 찬란하게 만들어 가는 일 말이다.
hyunjoo71@hanmail.net

김현주 한국국제교류재단 글로벌센터사업부장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27년간 <코스모폴리탄>, <우먼센스> <모닝캄>등 주요 잡지의 편집장으로 활약한 콘텐츠 전문가다.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을 거쳐 현재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문화 교류 업무를 맡고 있으며, 50대 중년이 되어 발견한 일상의 여유와 경험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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