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위기 숨은 원인? “자기 돈 찍는 중앙은행이 없다”
“미국의 재정 상황은 프랑스보다 나쁘죠. 그래도 미국의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예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돈을 찍는) 중앙은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로존 재정 위기 연구의 권위자인 폴 드 그라우베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 석좌교수는 지난달 16일 WEEKLY BIZ와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 프랑스 국채 금리 급등의 근원은 방만 재정이지만, 자국 중앙은행이 아닌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에 종속돼 있는 유로존의 구조가 위기를 증폭시킨다고 했다. 프랑스는 중앙은행이 있지만 유로존의 공동 화폐인 유로화를 기반으로 한 통화정책은 ECB가 총괄한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의 올해 프랑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전망치는 118.5%로 미국(126.8%)이나 일본(199.4%)보다 낮다. 그런데도 신용등급(무디스 기준)은 프랑스 Aa3(등급 전망도 부정적)가 미국 Aa1(등급 전망 안정적)보다 낮다. 국채 10년물 금리도 지난달 29일 기준 프랑스(4.89%)가 일본(2.88%)보다 훨씬 높다. 드 그라우베 교수의 설명대로 자국 통화를 찍는 중앙은행이 있느냐가 차이를 가른다는 것이다.

드 그라우베 교수는 벨기에 루뱅대 국제경제학 교수를 거쳐 LSE 유럽연구소 존 폴슨 유럽정치경제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1991~2003년 벨기에 상·하원의원을 지냈다. 유로존 위기가 한창이던 2011년 무렵 자국 통화를 찍을 수 없는 유로 회원국은 시장 공황이 부르는 유동성 위기에 취약하다는 ‘유로존 취약성 이론’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중앙은행이 있는 미국·일본, 없는 프랑스”
-프랑스는 연금 지출을 통제하지 못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
“문제의 근원은 (방만한) 재정이다. 재정 적자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고,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연금 제도다. 앞으로 극우나 극좌 세력이 집권하면 그간의 연금 개혁 역시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재정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런데 미국의 재정과 부채 상황이 프랑스보다 나쁜데도 아무도 미국의 디폴트를 예상하지 않는다. 독립된 주권국가(미국)와, 다른 기관인 ECB의 결정에 좌우되는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은 프랑스 사이의 큰 대비가 여기서 생긴다. 이 취약성이 초래하는 유동성 위기가 지급 불능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일본은 부채가 훨씬 많은데 위기를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행이 일본 국채의 주요 보유자라 그렇다. 중앙은행과 정부는 모두 공공 부문이니 하나로 묶어서 봐야 한다. 두 대차대조표를 합치면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는 사라진다. 그건 부채가 아니라 공공 부문 기관 사이의 대출이다. 그것이 일본 부채가 문제가 되지 않는 근본 이유다. 안타깝게도 유로존과 영국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ECB는 프랑스를 저버릴 수 없다”
-프랑스 국채 금리 급등이 2010~2012년 같은 위기로 번질까.
“당시 그리스는 물론 이탈리아·스페인의 스프레드(독일 국채와의 금리 차)도 지금 프랑스보다 훨씬 높았다. 역사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분명히 있다. 정치가 완전히 양극화돼 예산을 표결로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고, 재정 적자와 부채 수준이 높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상황은 나아지기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위기로 번질지는 ECB가 무엇을 하느냐에 크게 달려 있다. 나는 당시 ECB에 최종대부자가 돼 스프레드가 너무 높아지면 시장에서 국채를 사라고 촉구했다. 스프레드가 계속 오르면 ECB는 어느 시점에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사태를 두고 ECB가 TPI(전달보호수단) 카드를 꺼내들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TPI는 ECB가 2022년 7월 도입한 국채 매입 장치로, 특정 회원국의 국채 금리가 펀더멘털로 설명되지 않을 만큼 급등해 통화정책의 전달을 막을 때 그 나라 국채를 사들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재정 규율 준수 등 발동 요건이 복잡해 아직 한 번도 쓰인 적은 없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통화정책 전달을 위협하는 무질서한 시장 움직임이 있으면 대응할 수단이 있다”고 했지만, 앞서 14일에는 프랑스 문제의 “첫 번째 해법은 프랑스 안에 있다”고 선을 그었다.
-ECB의 TPI는 재정 규율 준수 등 조건이 붙어 있다. 프랑스에게 ‘동아줄’이 될 수 있나.
“시장이 프랑스를 상대로 투기에 나설 위험은 있다. 프랑스는 적어도 내년 5월까지는 정치적으로 재정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 그런 위기가 터지면 초점은 ECB가 무엇을 하느냐에 쏠릴 것이다. ECB는 프랑스를 저버릴 수 없다. (유로존의) 존립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그리스가 아니다. 그때는 ‘그리스를 내보내면 나머지는 그대로 굴러간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프랑스를 내보내면 전체가 무너진다.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자살 모드가 아니라면 ECB는 개입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유로본드(유로존 공동 채권)를 주장해 왔다. 실현 가능성이 커졌나.
“쉽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래서 기존의 반대가 모두 제쳐지고 ‘넥스트제너레이션EU(NextGenerationEU·EU 집행위원회가 회원국 공동 명의로 채권을 발행해 마련한 코로나 경기회복기금)’가 실제로 시작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극단적 위기가 없고, 공동 채권을 검토하려는 의지도 증발했다. 다시 큰 위기가 와야 가능할 것이다. 바라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나아간다. 미국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영국과의 전쟁 뒤 각 주의 전쟁 부채를 연방정부가 인수하자고 제안해 실행한 ‘해밀턴의 순간’도 깊은 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오늘날 유럽은 그와 거리가 멀다. 유로존은 취약한 구조물로 남을 것이다.”
◇“분열된 의회와 연금, 프랑스 정치는 ‘총체적 마비’”
-르코르뉘 총리가 2027년 재정 적자를 GDP의 5%로 낮추려 한다. 해낼 수 있나.
“지금 프랑스 정부는 해낼 수 없다고 본다. 다수파를 찾지 못하는 총체적 마비 상태다. 대선 전에는 확실히 그렇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 의회 다수파가 어떻게 될지 알기 전까지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어느 순간 시장은 모든 걸 보류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ECB가 중요하다. ECB가 (위기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이 모든 것이 유동성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
-부채 비율이 더 높은 이탈리아가 이제 프랑스보다 싸게 돈을 빌린다.
“남유럽에서는 전반적으로 재정 상황이 크게 개선됐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가 그렇고 이탈리아도 정도는 덜하지만 나아졌다. 요즘 곤경에 빠진 건 주변국이 아니라 유로존 핵심국 가운데 하나다. 그 결과 시장의 우려가 주변국에서 핵심국, 이번엔 프랑스로 옮겨 갔다.”
◇”영국 금리 상승은 인플레이션 탓, 부채 위기 아니다”
-영국은 자국 통화로 돈을 빌리는데도 30년물 국채(길트) 금리가 6%를 넘었다. 자국 중앙은행이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인가.
“영국 장기 금리를 끌어올리는 주된 힘은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이 높으면 장기 금리도 높아진다. 장기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로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것이 부채 위기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부채 위기는 영국 국채를 상대로 투기가 벌어졌는데 영란은행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지 않을 때 터진다.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본다. 지금까지는 영란은행이 (통화 긴축을 위해) ECB보다 더 공격적으로 보유한 영국 국채를 팔아 왔다. 이것도 영국 국채 금리가 유로존보다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 EU 재가입을 선택지로 거론했다. 재가입하면 유로를 쓰는 단계까지 나아갈까.
“우선 영국이 빨리 EU에 재가입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영국이 원하는 건 단일시장 접근을 개선하는 것이다. 정식 재가입을 하려면 국민투표를 다시 거쳐야 할 텐데, 누가 그걸 원하겠나. 나는 당시 영국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허위 정보와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설령 EU에 들어가더라도 유로존 가입은 별개다. 스웨덴·덴마크·폴란드처럼 유로를 쓰지 않는 EU 회원국이 여럿 있다. 영국이 (EU 복귀를 추진하더라도) 유로존에 들어가는 일은 분명히 논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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