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정의 톱밥 먹는 중입니다] [33] 근사한 목수의 신혼집을 꿈꿨건만
신혼집을 구했다. 매매는 포기했다. 대출 규제가 먼저 발목을 잡았고, 코스피 폭락이 겹쳤다. 남자 친구가 보유한 주식의 가격이 크게 떨어져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겼다. 그는 이미 속상해하고 있으니, 왜 미리 팔지 않았냐고 잔소리하지 말자. 이리저리 임장을 다니느라 지친 우리는 월세를 택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조건은 세 가지였다. 고양이를 받아주는 집, 주차가 가능한 집, 신혼부부가 살 만한 크기의 집. 보증금 3000만원에 월 90만원짜리 지상층 빌라 투룸을 얻었다. 모든 조건을 맞출 수는 없었다. 고양이는 되지만, 주차는 안 된다. 더 넓은 반지하도 고려했지만, 주변에서 극구 말려 체념했다. 월세를 더 올릴까 싶었지만, 저축이 줄어들 것이라 단념했다. 무릇 신혼이란 착실히 모아 앞날을 준비하는 시기 아니던가. 그래, 이게 최선이다.
현재 나는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인 투룸에 혼자 산다. 분당에서 서울로 옮겨갈 뿐인데, 두 명이 살 집이 이곳보다 작다. 주차비까지 더하면 4년 사이 체감 월세가 두 배로 오른 셈이다. 누굴 욕해야 하나 슬며시 화가 났지만, 그래 봤자다. 인생은 실전이고, 누구나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질 시간도 없다.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바쁘다.
버려야 한다. 자취를 오래 한 두 사람의 살림을 합치는 일이다. 밥솥과 전자레인지처럼 중복되는 가전은 성능을 비교하고, 침대나 소파처럼 덩치가 큰 가구는 가격을 따진다. “이거 얼마 주고 샀어?” 질문 몇 번에 내 이케아 가구들이 줄줄이 패배했다. 목공 학원에서 만든 가구들은 버리기 아까웠다. 만듦새가 조잡하지만, 어릴 때 쓴 그림일기를 그림이 서툴다고 버리진 않는다. 가구들이 일기장처럼 작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신혼집에는 내가 만든 가구를 들여놓고 싶었다. 근사한 목수의 신혼집을 꿈꿨다. 그러나 있는 것도 내다 버려야 하는 게 현실이다. 당근마켓이 바빠졌다.
감당 못 할 주거비 상승으로 삶의 공간을 빼앗기는 현실을 소박한 신혼의 행복으로 쉽게 화해시키고 싶지 않다. “그렇게 시작하는 게 신혼”이라는 어른들의 말에 무턱대고 감동하고 싶지도 않다. ‘주거 불안’이 주는 두려움의 깊이와 농도가 어떤 것인지 체감했다. 부동산 관련 소송을 수행하는 남자 친구는 의뢰인들에게 더 공감하게 됐단다. 정치할 때, 주거권은 인간의 기본권이라 외쳐댔던 나의 구호가 어떤 모양의 고통을 대변한 것이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이사하고 나면, 둘이 손잡고 동네를 걸어 다닐 생각이다. 그 동네에 뭐가 있는지 아직 모른다. 앞으로 단골이 될 식당은, 세탁소는 어디일까. 그나마 그것을 기대하니 설렌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팔면봉] 김민석 全大서 주장 신천지 의혹 “증거 못 찾아, 죄송”, 정청래 “책임져라”. 외
- [사설] ‘1호기’ 정보 유출 5개월 동안 몰라, 기업 혼냈듯 채찍질해야
- [사설] ‘여의도 저승사자’ 없애 놓고 “금융 범죄 수사” 주문하다니
- [정우상 칼럼] 이런 지하철과 버스, 보수의 굉장한 성취
- 보이저 1호 우주탐사선, 11월 18일 첫 1광일 거리에 도달
- [태평로] 광화문의 외국인 관광객이 ‘안보 자산’
- [특파원 리포트] 중국의 ‘광속 손절’ 공포
- [남성욱의 한반도 워치] 北 김정은이 왜 딸을 동반하는지 ‘구글’은 알고 있다
- [신문 속 작은 창문] [25] 말티재 넘은 晩秋
- [유재덕의 공유주방] [43] 원고지 앞의 견습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