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억년 거친 ‘온생명’…분리된 개체 아닌 전체의 연결망

한겨레 2026. 11. 2. 22:5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떤 시국사건(후에 조작임이 판명됨)에 연루되어 13년 2개월 동안 억울한 수감 생활을 했던 황대권 선생은 감옥 안에서 작은 생명체들을 기르고 관찰하면서 그 기록을 편지에 써서 외부로 내보냈다.

다시 말해 개구리 눈에 나무는 안 보이고 그 가지에 달린 나뭇잎만 보이듯이, 과학자 눈에는 생명은 안 보이고 거기에 매달린 생명체들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생명은 분리된 하나하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그 어떤 전체가 함께하는 속에 있다고 해야 한다.

마치 나뭇가지에 매달려 생존을 유지하는 나뭇잎만이 개구리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인과의 실타래에 매달려 그 생존을 유지하는 낱낱의 생명체만이 사람의 눈에 보일 뿐이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물리학자 장회익 경계를 넘어
17화 개구리 눈과 사람의 눈, 온생명 보기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어떤 시국사건(후에 조작임이 판명됨)에 연루되어 13년 2개월 동안 억울한 수감 생활을 했던 황대권 선생은 감옥 안에서 작은 생명체들을 기르고 관찰하면서 그 기록을 편지에 써서 외부로 내보냈다. 후에 이를 다시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유명한 ‘야생초 편지’(2002년, 도솔)다. 이 책은 섬세한 자연 관찰 기록만이 아니라 생명, 자유, 인간관계 등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담고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이 책에는 ‘위대한 청개구리’라는 제목 아래 저자가 직접 겪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작은 생명체와 교감하기 위해 청개구리 한 마리를 곱게 모셔다가 코카콜라 병 속에 넣고 키워보려 한다. 그러려면 청개구리에게 먹이를 줘야 하는데, 당연히 청개구리는 사람이 먹는 밥알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녀석이 먹을 것으로 생각되는 파리들을 잡아 병 속에 넣어줬지만, 청개구리는 여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적이 실망하던 차에 파리 한 마리가 깨어나 날아오르자, 청개구리는 혀를 번개처럼 내뻗어 파리를 잡아 삼키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지켜본 저자는 “청개구리의 혀가 번개처럼 뻗어나가 파리를 붙잡는 순간, 나는 생명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오직 살아 움직이는 것만이 먹이가 됐고, 생명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순간에만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 황 선생이 깨달은 생명의 위대함에 대해 폄훼할 생각이 없다. 다만 한 가지, 황 선생이 미처 알지 못했던 점은 개구리 눈에는 움직이는 것만 보일 뿐 정지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구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정지한 것을 보는 기능’은 진화 과정에서 낙후된 것이다.

그렇다면 개구리 눈에 나무는 어떻게 보일까.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움직이지만, 나무 전체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개구리는 나뭇잎들은 보고, 나무 자체는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웃을 노릇이지만, 기왕 그렇게 태어난 개구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정지한 것도 볼 수 있는 인간이 우월하다고 마냥 뽐내서는 안 된다. 사람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 불교 경전 열반경에 나온다는 ‘코끼리와 시각 장애인 우화’를 떠올려 보자. 인도의 한 왕이 시각 장애인 여섯 명에게 코끼리를 만지게 한 뒤,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상아를 만진 이는 “무 같다”, 귀를 만진 이는 “곡식 까부는 키 같다”, 다리를 만진 이는 “절굿공이 같다”, 등을 만진 이는 “평상 같다”, 배를 만진 이는 “장독 같다”, 꼬리를 만진 이는 “밧줄 같다”고 하며 서로 다투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와 아주 비슷한 일이 과학자들 사이에도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생명’이란 항목을 보면, 생명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 여섯 가지가 나온다. 이는 대사적, 생리적, 생화학적, 유전적, 열역학적, 자체생성적 정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암묵적으로 이들 가운데 하나 혹은 몇 가지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생명 자체에 대한 아주 포괄적이고 간결한 정의는 아무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앞의 코끼리 우화와 비교해 보면, 적어도 ‘생명이라는 코끼리’에 대해서는 과학자 모두가 시각 장애인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개구리 눈에 나무는 안 보이고 그 가지에 달린 나뭇잎만 보이듯이, 과학자 눈에는 생명은 안 보이고 거기에 매달린 생명체들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나무의 모습이 개구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사람 눈에는 보이듯이,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생명’(코끼리)을 볼 수 있는 좀 더 뛰어난 눈을 가진 존재는 없을까. 만약 우리보다 앞선 문명을 지닌 ‘우주인’이 있다면 그들의 눈에는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존재는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든 지혜를 짜내 이 이상한 ‘코끼리’의 모습을 그려줄 좀 더 추상적 차원의 이미지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에 앞서 우리가 현재 무엇을 잘못 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흔히 살아있는 존재들과 살아있지 않은 존재들을 구분하고, 살아있는 존재들 각각이 지닌 ‘살아있음’이란 성격을 추상해 이를 생명이라 부른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존재, 예컨대 다람쥐나 소나무는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본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것, 예컨대 바윗돌이나 시냇물은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 본다.

문제는 고립된 다람쥐나 소나무가 살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소나무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 햇빛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람쥐가 살아있기 위해서도 이러한 것들과 먹이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생명은 분리된 하나하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그 어떤 전체가 함께하는 속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들은 이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모든 인과관계의 그물 속에서만 생명 노릇을 하기에, 생명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인과의 실타래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이 ‘인과의 실타래’가 바로 과학자들이 더듬어 찾고 있는 ‘코끼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인과의 실타래가 더 이상 밖으로 뻗어나가거나 들어오지 않는 전 영역을 찾아냈다면, 생명은 바로 그 안에 있다고 해야 한다. 지구상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태양과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얽힌 요소들의 관계가 생명을 가능케 하는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생명은 이 안에 비로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과의 실타래로 엮어진 매우 정교하면서도 특징적인 전체의 모습은 사람의 육안에 잡히지 않는다. 마치 나뭇가지에 매달려 생존을 유지하는 나뭇잎만이 개구리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인과의 실타래에 매달려 그 생존을 유지하는 낱낱의 생명체만이 사람의 눈에 보일 뿐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만일 이 ‘인과의 실타래’를 머릿속에 분명히 그려낼 수 있다면, 이것으로 엮인 전체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적정한 이름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이를 말하기 전에 누구도 이러한 존재를 말한 일이 없었고 따라서 이를 지칭할 적정한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이를 ‘온생명(global life)’이라 명명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렇게 할 때, 다람쥐나 소나무와 같은 낱낱의 생명체들은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이런 하나하나의 낱생명은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함께 할 때 생명으로의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조건부 생명이 된다. 우리가 이제 온생명에서 특정 낱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보생명’이라 부른다면, 한 낱생명은 그 보생명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생명으로의 자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를 요약해 보자. 생명현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어느 한 곳에 이 현상을 자족적으로 발생시키고 또 지탱해 나가기에 충분한 ‘인과의 그물’이 마련돼야 한다. 이를 담고 있는 물리적 체계가 곧 ‘온생명’이다. 이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생명 이해의 핵심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오직 태양과 같은 항성과 지구와 같은 행성이 적정한 틀을 이루는 가운데, 그 안에 변이 가능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형성돼 지속적인 진화를 이룰 적정의 물리적 여건이 갖춰질 때 이것이 가능하다는 점만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우리 온생명’은 대략 40억 년의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각종 낱생명 뿐 아니라, 이 모두를 역추적해 낼 인간의 지성마저 포함돼 있다.

장회익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