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소설처럼… 시점과 이야기 바꿔보세요”

황지윤 기자 2026. 11. 2. 00: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년 만에 신작 소설집 낸 김연수
김연수는 이번 소설집을 한 마디로 “눈[目]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는 독자에게 “‘힘들 땐 위를 보세요’라는 말을 많이 한다”며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수많은 고통이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어느 순간 소설가 김연수(56)는 “내 소설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주저 없이 답할 수 있게 됐다. “과연 소설이 이 세상에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했던 그에게 찾아온 큰 변화다. 이는 그의 소설에도 녹아들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히고 있다.

4년 만에 신작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문학동네)를 펴낸 김연수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 카페 옥상에서 만났다. 2000년대 한국 문단을 이끌며 한국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가 무르익은 자신만의 소설론을 펼쳐 보였다. “글쓰기란, 다시 쓰기이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1994년 등단한 김연수는 30년 넘게 소설을 써왔다. 장편 ‘꾿빠이, 이상’(2001)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2007) ‘원더보이’(2012) ‘일곱 해의 마지막’(2020)과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2009) ‘이토록 평범한 미래’(2022) 등 꾸준히 작품을 펴냈으나 그에게도 ‘심적 슬럼프’는 있었다. 그는 “40대가 되니 이제 젊은 작가들처럼 쓸 수 없고, 내가 쓰는 방식이 시대에 뒤처질 수 있다는 공포가 들기도 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가 찾은 타개책은 독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소설의 필요성’에 대해 독자가 답을 내려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2022년부터 낭독회를 열기 시작한 작가는 “내가 만드는 이야기가 독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경험을 반복하며 불안을 지웠다. 행사가 100회쯤 넘어가자 소설에 삶을 다시 쓰는 힘이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는 독자에게 이런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궁지에 몰려 있으면, 궁지에 몰린 이야기를 바꾸는 다양한 방법을 써봅시다. 시점을 바꾸고, 이야기를 전복시켜 보면 어떨까요?” 소설의 기법을 삶에 활용해보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은 이런 생각을 갖고 쓰였다. 핵심은 ‘시간 여행’이라는 소설적 상상이다. 미래 시점을 확보해 서사를 재구성하는 작법이다. 김연수는 “미래로 가서, 미래의 시점을 얻은 뒤에, 다시 그 시점을 가지고 돌아와서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하면 “삶과 기억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쓸 수 있다”고 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당장 급급한 인생의 고민을 달리 볼 여지가 생긴다. 자신을 “시간 여행자”라고 칭하는 김연수는 “우리 모두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정체성이나 기억도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삶도 고치고 수정할 수 있다”고 했다. 소설가의 독특한 위로다.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카페꼼마 옥상에 선 소설가 김연수. /김지호 기자

표제작 ‘눈 내리는 삼일포’는 이 주제를 다룬 짧지만 묵직한 단편이다. 조선 후기 화가 현재 심사정(1707~1769)이 그린 ‘삼일포’를 둘러싼 이야기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삼일포’는 종이가 좀을 먹어 눈이 내리는 느낌을 주는데, 이를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둬 유명해진 작품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정조 대에 활약한 서얼 출신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아픈 딸을 살릴 약재를 구하려고 그림을 들고 의원을 운영하는 ‘나’를 찾아온다. “좀 먹은 그림 아니냐”는 ‘나’의 질타에 그는 “현재가 그림에 구멍을 뚫어 눈 내리는 삼일포를 구현한 것”이라는 거짓으로 ‘나’를 속인다. 심지어 이덕무는 서얼 출신이면서도 “훗날 반드시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 호언하며 당당히 ‘나’에게 약재를 요구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시점을 제시하며 사람을 살리려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덕무는 김연수의 소설론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는 김연수가 지향하는 소설가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김연수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면, 삶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