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이 만난 사람] ‘항명 파동’으로 유배된 아버지가 말했지… “그래도 박정희가 애국자데이”
비누서 시멘트까지 쌍용 흥망사
박정희·이병철·백선엽·법정 등
현대사 숨은 일화 생생히 기록
쌍용 해체? ‘영원한 내 것 없어’

남성의 거창한 역사 쓰기와 달리, 여성이 쓴 역사는 비화(秘話)로 가득한 이야기 보따리다. 미수(米壽)에 김인숙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장이 쓴 회고록이 그렇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속에 근현대사 숨은 삽화들이 그려져 있다. 법정스님이 불일암에 칩거한 이유가 육영수 여사 때문이었다는 걸 아는가.
쌍용그룹 흥망의 여정이기도 하다. 창업주 김성곤의 맏딸로, 아버지를 도와 기업을 일궜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승계에서 밀려난 서운함이 행간에 묻어난다. ‘나 여기 있어’라는 회고록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사회학 공부했으면 뭐해? 결국 난 모든 것을 양보한 이조시대 여인이었지, 하하!”
◇ “마, 괜찮다, 안 죽는다”
-미수에 회고록을 내셨다.
“손자손녀가 다섯인데, 내 어릴 적 얘길 들려주면 그렇게 재미있어하더라. 한 녀석이 ‘할머니, 책으로 쓰세요’ 하길래 용기를 내어 한 자 한 자 쓰게 됐다. 1년 8개월이 걸렸다.”
-책 제목이 특이하다.
“88세 되도록 크고작은 파도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고돌아 ‘Here I am!’ ‘나도 여기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파도’라기엔 너무 금수저 인생 아닌가.
“그것도 맞는 말이다. 부지런하고 역동적인 부모님 밑에서 그날그날 먹을 걱정은 안 하고 살았으니. 하지만 여섯 살에 선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신문배달하며 공부한 아버지, 그를 도와 맨손으로 가업을 일군 어머니는 우리를 공주, 왕자처럼 키우지 않았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철철 나도 어머니는 딱 한마디만 하셨다. ‘마, 안 죽는다. 일(어)나라.’”
-어머니가 여장부였나 보다.
“아버지보다 기가 더 세셨다. 대구서 비누공장 할 때 어머니 나이 불과 25세. 종업원 고용해 비누 만들고 월급 주는 일뿐 아니라, 밤에 방망이 들고 좀도둑 쫓는 일까지 다 어머니가 하셨다.”
-할머니야말로 강골이었다던데.”
“남편이 죽자 현풍 시골서 달구지에 6남매와 살림살이 싣고 대구로 온 분이다. 대구역 앞에 여관을 차려 생계를 이었는데, 교육열이 얼마나 강한지 세 아들을 다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 보내셨다. 이래저래 기 센 여인들과 평생을 산 아버지는 여자라고 못 할 것 없다며 날 유학까지 보내셨다. 물론 아들을 더 좋아하셨지만, 하하!”

◇ 이태영 변호사의 통치마
-비누공장에서 출발해 시멘트, 정유,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한 쌍용그룹의 여정을 유일하게 지켜본 자식이더라.
“대구서 시작한 비누공장은 가내공업이나 다름없었다. 안양서 금성방직을 할 땐 6·25가 터져 공장이 불타버렸다. 아버지를 언론에 눈 뜨게 해 동양통신을 인수하게 한 정일형·이태영 박사가 우리 집에 오신 날을 기억한다. 이태영 변호사가 미국서 공부한 여성이라고 해서 멋진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오실 거라 기대했는데, 통치마에 저고리 차림이라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웃음).”
-쌍용이 시멘트 사업의 첫삽을 뜬 현장에도 있었다..
“독일의 세계적인 시멘트 기업 훔볼트에 아버지와 동행했다. 아버지는 강원도의 석회석 샘플 분석을 의뢰했고, 훔볼트는 한국 석회석이 최고 품질이라며 기술 전수에 서명했다. 돌아보니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원자재 수입 없이 자체 생산한 유일한 상품이 시멘트였다. 동해 공장 준공식엔 박정희 대통령이 오셨다.”
-4선 의원이기도 한 김성곤은 박정희의 최측근이었지만, 1971년 ‘항명 파동’으로 축출된다. 중정에서 고초도 당했다던데.
“미국 보스톤 우리 집에서 1년 남짓 ‘유배’ 생활을 하셨다. JP, 조중훈 회장 등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는데, 그들이 뭐라 하든 아버지는 일절 반응하지 않고 약주만 드셨다. 그러던 어느날 밤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툭 던지듯 말씀하시더라. ‘야야,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애국자데이.’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귀국 후 얼마 안 돼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다르겠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고도 정이 많은 분이었다. 신문로 우리집 부엌엔 하루 종일 찌개를 끓이는 큰 솥이 있었다. 신문 돌리는 아이, 순찰 도는 순경, 트럭 기사들이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고 갔다. 티슈 한 장도 반으로 잘라 쓰던 분이다.”
-자식들에게 부동산은 사지 말라 엄명했다던데.
“이 좁은 땅에서 땅 투기를 하는 건 매국이라고 하셨지(웃음).”
-김성곤 빈소에서 이병철 회장이 탄식하는 대목이 있다.
“아버지를 ‘영감’이라 부르며 각별히 아끼셨다. 워낙 옷을 잘 입는 멋쟁이라, 이 회장님 만나러 가는 날엔 어머니가 아버지 옷을 신경써 입히느라 집안이 소란했다. 이 회장님에게 예술의 가치를 배웠다고 하셨다.”
-한국 사회엔 재벌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60~70년대 부자의 개념은 세 끼 걱정 않고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이병철, 정주영 등 당시 기업인들은 ‘내가 먹여 살리는 식솔이 몇 명이다’가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 말이 쉽지, 강원도 두메 산골에 들어가 시멘트 만드는 일이 수월한가. 잘못도 있겠지만, 가난한 시기를 국민과 함께 이겨낸 분들이라는 것도 인정해주면 좋겠다.”

◇ 법정스님과 육영수 여사
-어머니 김미희 여사는 육영수 여사와 가까우셨다던데.
“두 분 다 불교 신자였다. 육 여사가 하루는 도선사에 다녀오시더니, 홍수로 다리가 무너지고 길이 패였다며 보살님이 시멘트를 좀 깔아주면 어떠냐 부탁하시더란다. 이후 전국 사찰에서 장마철만 되면 시멘트 깔아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쌍용양회에 사찰 담당 부서가 따로 있었다(웃음).”
-육 여사를 직접 보셨나?
“어머니 말씀으로만. 다들 육 여사님이 인자하다고 하는데 실제는 무척 엄한 분이라고 하더라. 오히려 박 대통령이 눈물이 많다고, 육 여사 눈치를 많이 본다고 했다.”
-책에 법정스님 일화가 나온다.
“송광사 현우스님과 법정스님이 어머니를 찾아오셨다. 내가 스님 책 ‘서 있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어떤 분인가 궁금했는데, 마른 몸에 까무잡잡한 분이 말없이 앉아 계시기만 하더라. 용건은 법정 스님이 수행할 토굴(암자)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액수가 꽤 되는데도 어머니는 기꺼이 ‘예, 알겠습니다’ 하더라. 스님들 가신 뒤 내가 토굴 짓는 돈을 왜 우리가 내야 하느냐고 따진 기억이 난다(웃음).”
-스님의 칩거가 육 여사 때문이라고 썼더라.
“당시 대학생들과 유신 반대 운동을 하고 있던 법정스님을 육 여사님이 찾아가 반(反)정부 법문을 자제해줄 수 없겠느냐 부탁했는데, 스님이 거절하셨다더라. 그런데 8·15 기념식에서 육 여사가 문세광 총탄에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스님이 모든 걸 접고 산으로 들어가셨고, 우리가 불일암을 지어드린 것이다.”
-책에 백선엽 장군을 만난 얘기도 나온다.
“시멘트 사업차 아버지와 독일 가는 길에 파리에 들러 주불대사였던 백 장군을 만났다. 아버지는 파리에서 제일 좋은 식당으로 모시겠다고 했는데, 장군님이 거기는 비싸고 맛도 없다며 중국집으로 데려가더라. 검소하고 말씀도 조용조용 하시는 분이 어떻게 병사들을 이끌고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셨는지 신기했다. 돌아가셨을 때 초라한 빈소를 보고 우리는 왜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작은 흠집까지 들춰내 끌어내리려고만 하니 후손들이 무엇을 배울까.”

◇ 영원히 내 것은 없다
-쌍용그룹이 해체될 때 가장 힘들었겠다.
“고통스러웠지. 하지만 생전에 아버지는 쌍용이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 무엇이든 영원히 내 것은 없다.”
-재계 5위였는데.
“뭐든 무너지려면 도미노처럼 한꺼번에 밀려오더라.”
-장녀로 쌍용의 경영에 참여했다면.
“부질없는 생각이다. 다만 내가 너무 양보만 하며 살았다는 생각은 든다.”
-재단 이사장직도 82세에 맡았더라.
“내가 장남이었으면 그랬겠나, 하하!”
-유학 시절 인권, 노동, 여성 문제에 눈을 떴다.
“뉴욕서 대학원 다닐 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들었다. 존 레논이 ‘나는 하우스 허즈번드’라 선언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내(요코 오노)가 경제력이 더 있으니 살림과 육아는 자기 몫이라고 외치는 그 자신감이 얼마나 멋진가.”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로 30년 재직했다.
“쌍용은 없어졌지만, 아버지의 교육 열정이 깃든 국민대가 남아 있어 위로가 된다. 오너의 딸이 와서 월권한다 소리 들을까봐 늘 조심했다. 시간강사를 7년이나 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웃음).”
-학자로선 큰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고 썼더라.
“난 연구실보다 현장이 좋았다. 교도소 취재해서 쓴 박사논문 ‘여성 출소자들의 재사회화’는 그래서 뿌듯하다. 다시 태어나면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할 것이다.”
-차남이 ‘무한궤도’ 드러머 조현찬이다.
“대학가요제 나갈 때 우리집 지하실에서 얼마나 두드려대며 연습을 했는지, 일하는 아주머니가 ‘귀명창’이 돼 오늘은 박자가 맞았다, 틀렸다를 내게 알려줄 정도였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노력해 성공한 뒤 부모님 호강시키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진심이다. 나는 100번을 다시 태어나도 우리 부모님이 성취한 것의 백분의 일도 못 할테니까.”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은 이런 거다,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나는 부럽다.”
-참 솔직하시다.
“이 나이 되면 눈치볼 게 없다. ‘좌파’도 안 무섭다, 하하!”
☞김인숙
1939년 대구에서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했다. 오클라호마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하고, 뉴욕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연세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사회학회 부회장, 종교문화회 회장, 불교여성개발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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