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깃발

박명자 수필가 2026. 11. 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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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몽골 여행 중 이태준 열사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공원에는 아름드리 양버즘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다. 나무에서 떨어진 꽃인지 씨앗의 솜털인지 알 수 없는 흰 털 뭉치가 바람에 밀려 곳곳에 수북이 쌓여 있다. 낯선 땅에서 마주한 그 풍경이 이상하리만큼 쓸쓸하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기념관 벽면에는 태극기와 몽골 국기가 새겨져 있다.

남편은 외국 여행을 갈 때면 언제나 태극기부터 챙겼다. 일행이 많으면 큰 것으로, 적으면 작은 것으로, 함께 사진을 찍기에 알맞은 크기를 골라 가방 위쪽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본 나도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길에 태극기를 챙기곤 했다. 두바이의 번화가에서,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태극기를 펼쳐 들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추억을 남겼다.

친척이 살고 있는 괌에 갔을 때였다. 괌 정부가 2012년 4월 1일부터 약 4km에 이르는 거리를 '한국인의 거리'로 지정했다는 이야기를 친척에게 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거리가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뚜렷한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그곳에 태극기를 걸면 좋겠다고 했다.

며칠 뒤 귀국한 남편은 곧바로 태극기와 깃봉 백여 세트를 구입하여 괌 한인회로 보냈다. 얼마 후 한인회에서 남편이 보낸 태극기를 '한국인의 거리'에 사용했다는 답장이 왔다.

우리 세대에게 태극기 사랑은 각별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희망 하나로 뭉쳐 살아낸 시절이었다. 길을 걷다가도 국기 하강식 시간이 되면 걸음을 멈추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애국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가던 길을 갔다.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잠시 휴전했다는 친구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이야기지만, 그만큼 태극기와 애국가가 우리 일상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 이태준 선생의 업적을 하나씩 알아간다. 선생은 자신이 가진 의술로 낯선 땅 몽골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깊은 신뢰를 얻었다. 황제의 주치의로 활동했으며, 전염병 퇴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훈장도 받았다.

선생은 의술을 베푸는 데 그치지 않았다. 병원을 조국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중국과 몽골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교통편의는 물론 수많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병든 이들을 돌보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것이다.

이층으로 이어진 전시관을 돌아 나오자, 선생에게 편지를 쓰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선생의 희생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는 아쉬움과 감사한 마음을 엽서에 적고 돌아섰다.

이태준 열사에게 태극기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되찾아야 할 조국의 상징이었으며. 남편에게 태극기는 타국에서도 당당하게 펼쳐 든 마음의 깃발이다. 나라 사랑은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 내는 실천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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