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연의 인사이트 노트] 이직할 생각이 없어도 이력서를 써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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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명절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해지면 마음도 조금 스산해집니다. 한 해의 성과가 드러나고 승진과 평가, 보상과 조직 개편의 윤곽이 잡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올해 잘한 걸까?" "회사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년에도 여기서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평소 바빠서 밀어두었던 질문들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잡코리아가 최근 2년간 명절 전후 채용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명절 직후 첫 월요일의 이력서 등록 건수는 그해 평일 평균보다 49% 많았습니다. 덮어두었던 고민을 연휴 동안 곱씹다 행동으로 옮긴 결과일 겁니다.
특히 리더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라면 이 계절이 더 버겁습니다. 팀원들의 평가서는 밤새 고쳐 쓰면서 정작 자신의 한 해를 설명할 문장은 준비하지 못한 채 면담을 맞기도 합니다. 남의 성과는 누구보다 잘 찾아주는데, 자신의 성과 앞에서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런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이 가을, 이력서를 한번 업데이트해보십시오. 어디에 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점검하기 위해서입니다. 저 역시 이력서 한 장 덕분에 인생의 방향을 바꾼 적이 있습니다.
무교동 낙지집에서 들었던 한마디
30대 중반, 외국계 은행에서 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성과도 인정받았고 일의 지평을 더 넓히고 싶었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상사가 무교동 낙지집에서 점심을 사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어요. 그러니 남자를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욕심부리지 말고 조직에서 주는 역할에만 만족하세요."

어찌나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던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하면 길이 열릴 거라 믿었는데, 제 앞에는 성과만으로 넘을 수 없는 성별에 대한 낡은 편견의 벽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무교동 거리를 정처 없이 걸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날 저녁 남편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내다 보니 하나의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 조직에서 앞으로 내가 성장할 미래가 있는가?'
저는 이미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상당 부분 해냈고 더 다양한 일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직은 기회를 열어주기보다 현재의 역할에 만족하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 머물 것인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불확실한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 선택해야 했습니다.
저는 제 경험과 역량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해냈는지, 은행 밖에서도 통할 능력은 무엇인지. 그렇게 이력서를 쓰며 증권사 애널리스트라는 낯선 길에 들어섰습니다. 용기를 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떠밀리듯 내디딘 걸음이었습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었지요. 그런데 뛰어내린 뒤에야 제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돌아보면 그날 상사의 말이 없었다면 저는 그토록 절실하게 제 미래를 들여다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날의 절망은 저를 주저앉혔지만, 동시에 다시 일으켜 세운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력서는 나를 객관화하는 거울입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직을 권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곳이 나에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 떠날지 머물지보다 나를 객관적으로 점검하는 일이 먼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건강검진은 정기적으로 받으면서 정작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점검하지 않습니다. 일이 힘들고, 상사에게 서운하고, 평가가 억울하다는 감정은 가득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히 짚지 못한 채 감정에 휩쓸리곤 합니다.
이때 이력서를 '커리어 건강검진'으로 활용해 보십시오. 이력서(履歷書)는 글자 그대로 내가 밟아온 길과 내력을 적은 문서, 곧 나의 업무 역사입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했고, 내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적다 보면 뭉뚱그려져 있던 감정이 사실과 과제로 나뉘기 시작합니다.

진심으로 일하면 알아줄 거라 믿었다가 상처받은 적 있으시지요. 책임감 강한 여성 리더일수록 후배의 성과를 먼저 칭찬하고, 고비를 넘기면 동료들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몇 밤을 고민하고 갈등을 조율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평가가 끝난 뒤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끼면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진심이 통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상실감까지 더해집니다.
이럴 때일수록 내 몫을 제대로 셈해봐야 합니다. 이력서를 쓰는 과정은 내가 해온 일을 스스로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어보는 연습입니다. 막막하다면 지난 1년의 캘린더와 보낸 메일함부터 넘겨보십시오. 잊고 있던 회의, 밤늦게 보낸 보고서, 누군가를 대신해 수습한 일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그 기록을 연말 평가 이후가 아니라, 분기마다 상사와 나누고 필요한 코칭을 요청하십시오. 기여를 알리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책임지는 일입니다.
빈칸은 낙인이 아니라 여백입니다
막상 써보니 내세울 것이 없어 철렁할 수도 있습니다. 10년을 일했는데 A4 한 장이 채워지지 않는 막막함, 직함을 지우고 나니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당혹감.
그렇다면 먼저 물어보십시오. 해온 일을 잊고 있는 것인지, 팀의 성과 속에서 내 몫을 찾지 못한 것인지, 정말로 몇 년째 새로운 역량을 쌓지 못한 것인지. 앞의 두 가지라면 꼼꼼히 찾아 정리하면 되고, 마지막이라면 새로운 일을 맡아 이력에 담을 경험을 만들어야 합니다. 빈칸은 부족하다는 낙인이 아니라 앞으로 채워갈 여백입니다.
요즘은 AI를 활용해 이 과정을 더 깊이 있게 해볼 수도 있습니다. 지난 경험과 성공, 실패를 정리해 AI에게 건네고 "나의 반복적인 강점은 무엇인가?", "내가 놓치고 있는 약점은 무엇인가?", "앞으로 더 큰 역할을 맡기 위해 어떤 역량을 보완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십시오. 다만 내 경험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입니다. AI의 분석을 정답이 아니라 내 생각과 견주어 토론하는 재료로 삼을 때, 미처 몰랐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래의 이력서'를 한 장 써보시길 권합니다. 3년 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성과를 거둔 사람이고 싶은지 먼저 적고, 거꾸로 물어보는 겁니다. 그 이력을 만들려면 올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지금 조직에서 그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3년 뒤 '신사업을 이끈 리더'가 되고 싶다면, 올해는 작은 신규 프로젝트라도 손을 들어 맡고 관련 분야 사람들을 만나는 것부터입니다. 혼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멘토나 인생 선배와 이야기해보셔도 좋고, AI와 함께 실행 계획을 구체화해보셔도 좋습니다.
미래의 이력서를 쓰는 이유는 성장을 우연에 맡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루고 싶은 성과를 먼저 그려보고 오늘의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과거의 이력서가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미래의 이력서는 어디로 갈지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떠날 수 없어도, 이력서는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은행에서 증권사로, 다시 제조업의 전략 분야로 10년 주기로 업을 바꾸며 살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선택의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더 성장할 수 있는가.' 낯선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두려웠지만 그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제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떠나는 것만이 답은 아닙니다.

나를 돌아보았다면 이제 환경을 살펴야 합니다. 일이 맞지 않는 것인지, 역량이 부족한 것인지, 상사와 방식이 다른 것인지, 성장의 기회가 막혀 있는 것인지. 오해라면 대화로, 역량이라면 배움으로, 역할이라면 조정 요청으로 풀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에서 여전히 배울 것이 있고 강점을 발휘할 기회가 있다면 굳이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충분히 노력하고 소통했는데도 같은 벽이 반복된다면 새로운 무대를 준비할 때입니다. 물론 현실의 여건과 위험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홧김에 떠나는 것도, 무조건 참는 것도 답은 아닙니다.
당장 떠날 수 없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아이의 학교, 대출, 돌봐야 할 부모님, 이제 막 자리 잡은 팀. 마음은 다른 가능성을 향하지만 현실은 움직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앞으로도 선택지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배울 것을 배우며 미래의 이력서에 적어둔 한 줄을 현실로 만들어가면 됩니다.
한 해가 저물기 전, 노트북 속 오래된 이력서를 꺼내보십시오. 내가 해낸 일을 찬찬히 살피고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이력서도 한 장 펼쳐보십시오.
상사가 매기는 성적표를 받기 전에, 먼저 스스로의 한 해를 평가해보는 겁니다. 두 장의 이력서 사이에서 막연했던 내일의 윤곽이 조금씩 선명해질 것입니다.

김희연 전 LG디스플레이 전무 은행원, 증권사 IT 애널리스트를 거쳐 LG디스플레이 최초의 여성 전무 자리까지 오른 33년 경력의 리더십 전문가. 최근 <공감 지능 시대>를 출간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강연가로 활동 중이다. 개인의 성과를 넘어 조직의 성과를 만드는 리더십, 차가운 데이터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공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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