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공개’라는 김대중·김정일 차 안 밀담…목소리도, 내용도 가짜였다

2026. 11. 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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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팩트체크]
SNS·유튜브 타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극비 녹취’ 주장 영상 다시 확산
2016년부터 유통된 엉터리 주장…20년 전 폐지된 반공법 폐지 지시까지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차량 안에서 나눈 대화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공개했다고 주장하는 유튜브 영상의 한 장면. 영상에는 김정일이 아버지를 ‘김일성 시체’라고 부르는 등 실제 발언으로 보기 어려운 대화가 등장한다. CIA가 해당 녹취자료를 공개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유튜브 캡처.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처음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두 사람이 공항에서 숙소인 백화원초대소까지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나눈 극비 대화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감청했고, 그 내용이 공개됐다는 영상이 온라인에 유통되고 있다. 확인 결과 실제 대화 녹음으로 인정할 근거가 없는 영상이다. 대화 내용에도 당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럿 발견됐다.

유튜브에 올라온 9분 39초 분량의 영상 제목은 ‘2000.6.13. 순안공항 김정일 김대중 차 안 밀담(CIA유포자료)’이다. 영상 설명에는 “극비 내용을 CIA에서 감청 후 주월 이대용 장군에 의해 세상에 공개”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영상은 검은 바탕에 ‘CAUTION’이라는 문구를 띄운 뒤 김대중과 김정일의 대화라는 내용을 자막으로 보여준다. ‘본 영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CIA가 개방한 녹취자료입니다’라는 안내도 반복된다. 실제 차량 내부 모습이나 당시 회담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CIA가 작성한 문서나 녹음 원본의 출처도 제시하지 않는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영상에서 김정일로 표시된 화자는 김대중에게 남북 통일을 위한 법과 정치체제를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2001년 4월 1일 남한을 방문해 통일 방안을 논의하고, 그해 8월 15일 ‘조선민주연합’이라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출범시킨다는 구상이다. 김대중이 초대 대통령을 맡고 김정일 자신은 부통령을 맡겠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후 김대중이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면 김정일이 대통령이 되고, 김근태를 부통령으로 세운다는 주장까지 이어진다.

영상 후반부에는 남한 군부 인사들의 움직임과 김정일의 서울 답방 문제도 거론된다. 김정일이 한국전쟁과 아웅산 테러 등을 사과해야 한다는 군부 인사들의 요구 때문에 답방이 무산됐다는 취지다.

이 대화가 실제로 이뤄졌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먼저 출처부터 불분명하다. CIA가 감청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문서번호, 공개 일자, 감청기록 원본이나 공식 확인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 CIA는 기밀해제 자료를 전자열람실을 통해 공개하고 있지만, 해당 영상의 대화를 공식 공개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미국 정보기관이 실제로 차량 내부를 감청했는지 여부 역시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영상이 최근 새롭게 공개된 기밀자료도 아니다. 같은 내용은 적어도 2016년 7월부터 온라인에 유통됐다. 당시 ‘김정일, 김대중에 차중 지시: 통일 대통령, 동지가 먼저 하라’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이 게시됐고, 여러 온라인 게시판에 이대용 전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의 증언이라는 설명과 함께 퍼졌다.

이대용은 실존 인물이다. 베트남전쟁이 끝날 무렵 남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했고, 사이공 함락 이후 현지에 억류됐다가 귀국한 예비역 육군 준장이다. 2017년 11월 14일 별세했다. 그러나 그가 CIA로부터 해당 감청자료를 받았다는 객관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영상에 등장하는 음성이 실제 이대용의 목소리인지, 그의 발언이 어떤 경위로 녹음됐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설령 이 전 공사가 해당 내용을 전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김대중과 김정일의 실제 대화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대화 내용 자체에도 오류가 있다. 2016년부터 유통된 같은 주장의 글에는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첫째 반공법 없애고 지금부터 평화헌법을 극비리에 만들어라”라고 지시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반공법은 1980년 12월 31일 이미 폐지됐다. 당시 국가보안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반공법의 관련 내용을 국가보안법에 통합했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남아 있는 법률 제3318호의 개정 이유에도 이 같은 사실이 명시돼 있다. 2000년 정상회담에서 이미 사라진 반공법을 폐지하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다.

남북 정상이 대통령과 부통령 자리를 나눠 갖기로 했다는 주장도 당시 헌정체계와 맞지 않는다. 2000년 대한민국 헌법에는 부통령 직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며 임기는 5년 단임이다. 정상끼리 합의하거나 특정 법률을 만든다고 대통령직을 번갈아 맡을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영상에서 제시하는 2001년 4월 김정일의 남한 방문과 같은 해 8월 새로운 국가체제 출범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2000년 6월 15일 두 정상이 서명한 남북공동선언에는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양국 정상이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권력을 분담한다는 내용은 없다.

음성의 말투 역시 실제 알려진 목소리와 전혀 다르다. 김대중으로 표시된 화자는 실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알려진 억양과 차이를 보인다. 전남 출신인 김 전 대통령 특유의 말투보다 경상도 사투리에 가깝게 들린다. 억양만으로 음성의 진위를 최종 판정할 수는 없지만, 실제 육성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만한 대목이다.

더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김정일로 표시된 화자의 발언이다. 목소리도 김정일의 목소리가 아니지만, 그는 김대중과의 대화에서 아버지를 가리켜 ‘김일성 시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북한에서 김일성은 사후에도 영원한 주석이자 최고지도자로 숭배되는 존재다. 김정일 자신이 아버지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도록 하고 금수산기념궁전을 추모시설로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이 남측 대통령과의 첫 대면 자리에서 아버지를 ‘김일성 시체’라고 불렀다는 것은 북한의 공식 언어관행과도 어긋난다.

그렇다면 실제 순안공항에서 백화원초대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피스메이커>다. 2008년 발간된 이 책에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과정부터 실제 회담까지의 막후 협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임동원이 회고한 당시 가장 민감한 의전 문제 중 하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여부였다. 금수산기념궁전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현재의 금수산태양궁전이다. 북한은 김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해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남측은 국내 정치적 파장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임동원은 <피스메이커> 81쪽에서 두 정상의 순안공항 상봉을 지켜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정일이 공항에서 백화원으로 이동하는 도중 갑자기 차량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향하게 해 김대중 대통령의 참배를 기정사실로 만들 가능성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실제 김정일은 사전 협상 과정에서 김 대통령이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하도록 여러 차례 요구했다. 자신이 서울을 방문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겠다는 제안도 내놨다. 이 문제는 정상회담 기간까지 해결되지 않은 민감한 쟁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도 훗날 육성 회고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면 남한의 여론이 악화돼 남북 화해와 협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리로 김정일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회담 기간 중 결국 참배 요구를 철회했다. 김 대통령은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하지 않았다.

당시 공항 영접과 차량 이동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순안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했다. 이후 김정일이 김 대통령의 승용차에 동승해 백화원초대소까지 약 45~50분간 함께 이동했다. 이 장면과 이동 사실은 당시 국내외 언론이 보도했다. 두 정상이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눈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 전체가 공개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2024년 12월 29일에는 또 다른 CIA 감청설이 언론에 등장했다. 스카이데일리는 김정일이 차 안에서 노무현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목했다는 주장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서도 CIA가 이대용 전 공사를 통해 감청 내용을 전달했다는 설명을 내세웠다. 다만 이번에 유통되는 영상의 ‘조선민주연합’과 대통령·부통령 교대 구상은 해당 보도와 내용이 다르다. CIA 원자료를 제시하지 않은 채 이대용을 전달 경로로 지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 사실이 당시 대화라고 주장하는 모든 음성자료의 진위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이번 영상에서 확인되는 것은 CIA가 공개했다는 설명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성, 그리고 자막뿐이다. 이미 폐지된 법률을 없애라는 지시와 실현되지 않은 권력 교체 시나리오까지 등장한다.

정리하자. 미국 CIA는 순안공항에서 이동할 당시 김정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밀담을 감청해 공개했는가. 아니다. 영상은 당시 대화를 기록한 검증된 사료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유통된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실제 정상 간 밀담인 것처럼 포장한 자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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