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원 “배고플수록 음악이 고팠는데 마음 비우니 음악이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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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세월과 더불어 잊힌 얼굴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그리운 존재다. 1970년대 한국 포크 음악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가수뿐 아니라 작곡가·시인·음악 디렉터로서도 한국 대중음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당시는 가수로서 무대에만 섰던 게 아니라 아주 다채롭게 활동했다. 15편 정도의 영화에 참여해 영화음악도 만들었다. '바람 바람 바람' '풀잎처럼 눕다' 같은 작품에서다. 내가 작곡한 '임이 오는 소리'는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엔딩곡으로도 삽입됐다. 가수 가인과 민서(김민서)가 불러 젊은이들도 많이 알더라."
"그 무렵 포크 음악의 무대는 크게 쎄시봉과 미도파 살롱으로 나눠져 있었다. 나는 그때 미도파 살롱에 전속돼 매주 '12시에 만납시다'라는 기독교방송의 라이브 무대에 섰고, 박인희 씨는 MC로 활동했다. 그러다 청중이 박인희 씨에게 노래를 권유해 우연히 같이 'Let It Be Me'를 부르자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이를 계기로 TV 출연 요청이 들어와 급히 '뚜아에무아'라는 이름을 지어 듀엣 활동을 시작했다. 둘 다 대단한 가수가 되려 하기보다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점도 잘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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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너와의 결별과 홀로서기의 고독
● 배고픔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열정과 신념
● 가수 윤상의 인생 바꾼 45분 신시사이저 독주
● 화려한 무대 뒤로하고 순리 따르는 삶 지향

세월이 흘러 서울 명동과 음악다방을 채우던 청춘의 공기는 아련한 추억이 됐지만, 그가 남긴 명곡들은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은은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뚜아에무아'로 활동할 때 그는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 '약속'을 비롯해 '그리운 사람끼리' '임이 오는 소리' '스카보로우의 추억' 등을 발표해 한국 포크 음악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솔로 가수로 활동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추억' '미련' '가로등' '바람꽃' '고독한 양치기' 등 인간 내면의 감정과 성찰을 그린 노래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77년 송영수 감독의 영화 '나비소녀'를 시작으로 한동안 영화음악을 만드는 작업에 심취하기도 했다.
화려한 무대와 대중의 환호 뒤편에서 그는 늘 인기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음악적 자존심을 지켜왔다. 한국 신시사이저 음악의 선구자이자 작곡가로서 1984년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하고, 1976년 첫 시집 '바람꽃'에 이어 2006년 두 번째 시집 '내 영혼이'를 출간하는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증명한 그이지만, 삶의 길목에서 느닷없이 마주한 고독과 이별의 아픔을 피할 순 없었다.
3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경기 광주시 한적한 주택에서 뚜벅뚜벅 음악 작업을 이어가는 그를 가을의 한복판에서 만났다. 어느덧 팔순의 나이가 됐지만 "인기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한결같이 지키는 그의 기백은 청춘의 그것 같았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청춘의 멜로디와 시대의 풍경
연락이 닿지 않아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이곳 경기 광주에 연고가 있나."내 고향은 경남 하동이지만 열두 살에 서울로 올라와 얼마 전까지 아파트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의논해 이 집으로 이사했다."
집이 참 예쁘다. 여기서 자녀와 같이 사나.
"지금은 반려견과 함께 산다. 아이들은 직장 때문에 다른 지역에 산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나.
"직접 차려 먹는다. 이래 봬도 찌개도 잘 끓이고 요리를 좀 하는 편이다(웃음)."
수소문하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알게 됐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활동도 20여 년간 했다고 하던데.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서울 서초동 성당에서 사목회 부총무 2년, 총무 2년, 전례분과위원장을 4년간 맡았고, 2년간 성찬봉사를 했다. 영성체의 비정규 집전자를 성찬봉사자라고 한다."
그는 성찬봉사자 교육을 이수해 1996년 고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직접 자격증서를 받았다. 이를 기념해 찍은 사진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의 집 안에는 '뚜아에무아' 시절 발매한 롱플레이트(LP) 판과 추억이 깃든 사진들도 곳곳에 배치돼 있다. 지금은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원로 뮤지션이지만 20대 시절 그의 모습은 여심깨나 홀릴 정도의 '훈남(훈훈한 미남)'이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당시는 가수로서 무대에만 섰던 게 아니라 아주 다채롭게 활동했다. 15편 정도의 영화에 참여해 영화음악도 만들었다. '바람 바람 바람' '풀잎처럼 눕다' 같은 작품에서다. 내가 작곡한 '임이 오는 소리'는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엔딩곡으로도 삽입됐다. 가수 가인과 민서(김민서)가 불러 젊은이들도 많이 알더라."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그가 만든 노래는 150곡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곡으로 그는 '약속'을 첫손에 꼽았고, '추억'과 '임이 오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1970년 박인희 씨와 듀엣을 결성한 결정적 이유가 뭔가.
"그 무렵 포크 음악의 무대는 크게 쎄시봉과 미도파 살롱으로 나눠져 있었다. 나는 그때 미도파 살롱에 전속돼 매주 '12시에 만납시다'라는 기독교방송의 라이브 무대에 섰고, 박인희 씨는 MC로 활동했다. 그러다 청중이 박인희 씨에게 노래를 권유해 우연히 같이 'Let It Be Me'를 부르자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이를 계기로 TV 출연 요청이 들어와 급히 '뚜아에무아'라는 이름을 지어 듀엣 활동을 시작했다. 둘 다 대단한 가수가 되려 하기보다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점도 잘 통했다."
음악에 대한 검열이나 통제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있진 않았나.
"당시 쎄시봉은 주로 야간에 노래하는 무대였고, 미도파 살롱은 낮에 생방송을 하는 장소였다. 박인희 씨와 나는 야간 무대는 일절 안 한다는 합의하에 같이 활동했다. 뚜아에무아의 데뷔곡이 내가 작사·작곡한 '약속'인데, 그 시절의 청춘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면서 그야말로 대히트를 했다. 검열과 통제는 부분적으로 심했지만 우리 노래는 순수한 감성에 호소하는 곡들이어서 크게 방해받지 않고 음악적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대중가수인데도 인기를 갈구하지 않았다는 건가.
"그렇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음악을 인기와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떳떳한 음악만 하자'는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
그 당시 가수는 배고픈 직업이었는데 가장으로서 힘들지 않았나."힘들었다. 그때는 음반이 많이 나가도 가수는 계약금을 받는 정도였고, 수익은 대부분 기획사가 가져갔다. 박인희 씨에게 신세를 졌고, 일본에서 지내시던 아버지에게도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음악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나.
"한 번도 없다. 배고플수록 음악이 더 고팠다고 할까. 내가 추구하는 음악을 하고 싶은 욕망이 더 생기더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팔지 않고, 나 자신에게 떳떳한 곡만 세상에 내놓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한국 신시사이저 음악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런 별칭은 어디서 비롯됐다고 보는가.
"싱어송라이터인 윤상 씨가 한 방송에서 '한국에서 신시사이저 음악의 선구자가 이필원'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11시에 만납시다'라는 KBS 프로그램에서 내가 45분간 단독으로 신시사이저 독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운명이 바뀌었다고 말했는데 그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어려서부터 배운 건 아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지냈는데 당시 일본 말을 할 줄 몰라 접하게 된 것이 클래식 기타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하면서 신시사이저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다."
싱어송라이터로서 평생에 걸쳐 지켜온 철칙이 있나.
"내 영혼이 떳떳하지 못한 건 마이크 앞에 세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싱어송라이터로서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냥 음악이 좋아서 순수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작업에 임했다."
가수로서 가장 고독했던 시기는 언제인가.
"뚜아에무아가 해체된 직후다. 함께하던 파트너가 없어졌으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때 내 버팀목은 변함없는 사랑과 응원으로 나를 지탱해 준 팬들과 내 감정을 담아내던 통기타였다."
뚜아에무아는 왜 해체됐나.
"다툼이 있거나 사이가 나빠서는 아니다. 인기 정상에 오르다 보니 박인희 씨를 DJ로 스카우트하려는 곳이 많았다. 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박인희 씨가 나한테 같이 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그냥 노래만 하겠다'고 했고, 박인희 씨는 DJ의 길로 갔다. 이후 박인희 씨가 같이 연습하던 곳에서 전화로 내일모레면 미국으로 떠난다고 알려줬다. '신앙생활 잘 하시라'는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는 연락이 끊겼다."
기자는 박인희 씨를 인터뷰해 7월 중순 발간된 '신동아' 8월호에 실었다. 오랫동안 안부를 모르고 지내온 두 사람을 유선으로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 도중 박인희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 씨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시각 박 씨는 11월 하순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단독 콘서트 준비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욕심 내려놓으니 보이는 소소한 행복
포크 음악은 기교보다는 진심을 담담히 읊조리는 장르다. 마이크 앞에서 목소리를 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이다. 물 흐르는 대로 노랫말에 담긴 진심을 따라가면서 감정을 표현한다. 노랫말이나 멜로디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시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특별한 경험을 통해 뭔가를 짜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감정과 감성을 음악이나 시에 담아내는 걸 즐긴다. 음악과 나 자신이 완전히 일체가 되는 삶을 지향해 온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아름다웠을 청춘의 시기는 어떤 계절과 닮았나.
"가을이다. 사계절 가운데 가을을 특히 좋아한다. 경복궁에서 뚜아에무아 노래를 연습하던 때도 가을이었다. 그 기억도 많이 나고, 연습할 장소가 없어서 둘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연습하던 일도 떠오른다. 그때는 매니저가 없을 때라 의상부터 모든 걸 다 직접 준비했다."
뚜아에무아로 활동하던 시절의 재미난 에피소드는 없나.
"박인희 씨도, 나도 내성적이다. 함께 연습할 때도 조용히 음악만 했다(웃음)."
대중의 환호 속에서 살다가 오랜 세월을 평범한 일상의 영역에서 지냈다. 그러는 동안 삶을 대하는 태도나 가치관이 달라졌나.
"과거에는 무대에서 박수 받는 것을 전부로 여겼다면, 지금은 순리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 이필원의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일상의 작은 행복이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
그런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 계기가 뭔가.
"종교다. 1987년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집착이나 욕망이 많이 비워졌다."
인생의 전성기는 언제였나.
"1980년부터 1984년까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1984년에는 작곡가로서 한국방송대상을 받는 큰 기쁨을 맛봤다. 그때 같이 대상 후보에 오른 사람이 길옥윤 선생님이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작곡가이기에 나로서는 후보에 오른 것만도 영광이었다. 그런데 그 상이 내게 주어졌다. 이건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나타나 우리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꾼 얼마 뒤의 일인 데다가, 그 상을 받은 것도 교황의 방한 기념 작품 덕분이다."
그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기념 다큐멘터리 '베들레헴에서 절두산까지'(MBC)와 '한국 야생화의 사계'라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음악감독으로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한국방송대상(음악 부문)을 수상했다. 1976년 '바람꽃'에 이어 2006년 '내 영혼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가수 1호'이기도 하다. 그해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그는 30년 만의 새 앨범 'My soul is'를 함께 발표했다.
시 쓰기를 원래 좋아하나.
"어릴 때부터 시라는 문학 장르를 좋아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문학의 밤' 같은 글쓰기 행사에 종종 나가곤 했다. 지금도 일기를 쓰듯 시를 쓴다. 시와 음악은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요즘 일상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소소한 기쁨은 뭔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차 한잔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날씨를 살핀 후 반려견과 같이 산책하는 것이 루틴이 됐다. 그런 평범한 삶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낀다. 예전에는 자연을 소홀히 했는데 지금은 식물들의 성장 과정을 눈여겨보고 그러면서 떠오르는 게 있으면 2층에 올라가 음악 작업을 한다. 요즘은 내가 창작한 음악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 '이필원' 채널에 올리곤 한다. 노래하는 시인이자 오랫동안 뚜아에무아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장수경 씨와 함께 작업한 영상이 많다."

팬 미팅? 만나고 싶지만 두려움 앞서
세월이 흐른 만큼 '가수 이필원'을 그리워하는 팬이 많다. 팬 미팅 같은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떤가."나도 팬들을 만나고 싶은데 두려움이 앞선다. 이 나이에 옛날의 향수를 불러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런 만남의 자리를 계획하려면 좀 부지런해져야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좀 게으른 편이다(웃음)."
청춘일 땐 음악을 통해 세상과 치열하게 소통했다면, 지금은 세상의 소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듯 보인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내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길지 않을 것이다. 뭐든 서두르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고 싶다. 있는 그대로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하나하나씩 비워가는 삶이 좋다. 그러면서 행복을 느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지난 세월에서 스스로 "참 애썼다"고 다독여 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특별히 어느 한순간이라기보다는, 묵묵히 내가 하고자 하는 음악의 결을 지키며 살아온 모든 나날이 아닐까 싶다. 또한 투병 중이던 아내와 함께 눈물 흘리며 버텨낸 시간 역시 나 자신과 우리 부부에게 가장 잘 견뎌냈다고 다독여 주고 싶은 순간이다."
남은 인생의 여정에서 비움이 아닌, 새롭게 채우고 싶거나 꼭 붙들고 싶은 삶의 가치는 뭔가.
"그런 건 별로 없다.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도 같은 삶을 그대로 살 것 같다. 아티스트로서 그냥 조용히 음악하면서…."
대중의 기억 속에 가수 이필원, 그리고 인간 이필원이 어떤 사람으로 머물길 바라나.
"청춘의 아픔을 노래로 달래려 애써 왔던 만큼 언제나 따뜻한 온기로 가슴속에 머무는 가수로 기억되면 좋겠다."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을 방황하는 후배 음악인, 저물어가는 청춘을 아쉽고 쓸쓸하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건네고 싶은 조언은 뭔가.
"조급해하지 마라. 꽃은 언제나 자기 계절에 피어난다. 지금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더 깊은 뿌리를 내리기 위한 진통이니, 자신을 믿고 묵묵히 걸어가라고 말해 주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며 "못다 한 이야기가 있으면 편하게 들려달라"고 주문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늘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가 기자를 배웅하며 남긴 마지막 인사말은 스스로에게 한 당부이자 다짐이었다.
"마음을 비우면 음악이 채워진다. 내 노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과 함께 앞으로도 산에서 부는 바람처럼 편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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